[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4>답답한 정치, 제대로 바꾸자
(下)선진국 시민교육의 힘
“스톡홀름의 모든 시민에게 교통카드를 무료로 나눠주면 어떨까?”(교사)
“모두가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어요.”(프레드리크·9)
“하지만 버스 운전사 월급은 누가 주나요?”(리티아·9·여)
9월 11일 오전 8시 스웨덴 스톡홀름 비옐크내스 초등학교 3D반. 초등학생 23명이 이른 시간부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주제는 교통정책. 스웨덴 총선을 사흘 앞두고 학교 측이 학생들이 선거를 이해하기 쉽도록 정치·사회교과 특별수업을 마련했다.
“교복을 입는 것이 좋으니 싫으니?” 마리카 묄러 교사는 첫 질문으로 가장 쉽고 익숙한 주제부터 던졌다. 이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의 장단점’과 ‘동물원이 필요한가’를 물었다.
어린 학생들의 토론 주제는 ‘학교 내 무료급식’과 ‘교통카드 무상 보급’까지 확대됐다. 한국에선 보수와 진보 진영이 편을 갈라 찬반 토론을 벌이는 ‘학교 무상급식’ 이슈를 스웨덴에선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입에 올리고 있었다. 한 시간에 걸친 특별수업 동안 칠판에 적힌 글자는 아예 없었다. 한국의 초등학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이다.
○ ‘요람’에서 시작되는 정치
묄러 교사는 어떤 상황에도 어린이들의 말을 끊지 않았다. 아이들이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머뭇거려도 기다렸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뿐 명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둘러앉은 어린이들은 스스로 고민하며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했다.
“아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고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 수업의 목적입니다. 특히 이런 문제들은 아무도 정답을 알려줄 수 없죠. 아이들이 자라면서 스스로 풀어야 하는 문제들입니다.”
스웨덴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토론수업을 시작한다. 개선해야 할 학교 규칙, 자신이 사는 동네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권장한다. 중고교에선 보다 복잡한 사회문제가 학생들에게 제시된다. 학교가 민주주의를 키우는 ‘요람’ 기능을 하는 셈이다.
이런 ‘정치적 시민교육(정치교육)’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독일, 네덜란드 학교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1, 2학년부터 배우는 사회·자연 통합교과목인 ‘자크쿤데’의 수업 대부분이 토론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토론 과정을 통해 법과 공공질서는 왜 지켜야 하는지, 자전거를 탈 때 헬멧은 왜 써야 하는지 등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특히 독일에선 토론 수업을 할 때 교사가 ‘정치교육의 헌법’이라고 불리는 ‘보이스텔스바흐 협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1976년 만들어진 이 협약은 △교사의 의견을 학생들에게 주입해선 안 되며 △논쟁이 한 방향으로 쏠리지 않도록 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밝히도록 지도하라는 3가지 원칙을 담고 있다. 교사들도 정당에 가입할 수 있지만 교육현장에서 정치적 시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협약 덕분이다. 네덜란드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 주당 2시간씩 정치·사회 문제 토론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 “어른들만의 선거가 아니에요”
유럽 주요국가에서 선거는 단지 어른들만의 축제가 아니다. 총선을 앞두고 스톡홀름 최대 번화가 세르옐 광장에 차려진 각 정당의 공약 설명 부스에는 성인들뿐만 아니라 중고교생과 초등학생들도 몰려 왔다. 마이크를 든 정치인과 ‘박수 부대’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초등학생들은 부스 앞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정당 관계자들과 즉석토론을 벌였다.
“어린이를 위해 무슨 정책을 펼칠 건가요?”
“그 정책은 저번에도 내놓지 않았나요?”
장애를 지닌 초등학생 3명을 데리고 온 헬스보 대안학교의 비르기타 헤드스트럼 교사(58·여)는 “아이들에게 이 나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교생들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다른 정당과 얼마나 다른 정책을 펼칠지 궁금해했다. 티레스 고교에 재학 중인 시모네 린드퀴스트 양(15)은 “학교 숙제로 정당별 교육정책을 비교하는 리포트를 제출해야 한다”며 “각 정당에 관심 있는 주제를 직접 물어보면서 왜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에선 총선 등 주요 선거가 열릴 때마다 대부분 초중고교에서 모의선거를 치른다. 투표방식과 투표용지는 실제 투표와 똑같다. 학생들의 투표결과는 학교별로 자체 발표하거나 정치교육 지원기관에서 집계해 발표한다. 스톡홀름 글로발라 고교의 제니페러 로페스 학교선거조직위원장은 “이번 총선을 맞아 전국 1400개 중고교에서 모의선거가 실시됐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정치교육 기관 ‘프로데모스’가 발표하는 초중고교 모의투표 결과는 각 정당의 ‘미래 성적표’다. 이 때문에 각 당은 미래의 유권자인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정책을 알리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네덜란드 공영방송 NOS는 ‘어린이 뉴스’ 프로그램에서 각 정당의 대표를 방송국으로 불러 아이들과 토론을 벌인다. 이 뉴스 방송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 일상 속에 녹아든 정치교육
정치교육은 일상생활 곳곳으로 녹아들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 100km 북쪽에 위치한 라벤스부르크 수용소 기념관. 나치는 이곳에 수용된 여성들을 위안부로 내몰았다. 독일 정부는 이곳에서 당시 수용자들의 증언 영상, 수용자들이 쓴 글과 그림 등을 그대로 전시해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알리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9월 13일에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최근 ‘여성 쉰들러’로 새롭게 조명받는 엘리자베스 폰 타덴(1890∼1944)을 기리는 전시회를 브란덴부르크 주 연방정치교육원이 주최했다. 하이델베르크 근교에 학교를 세웠던 그는 유대인 학생을 내쫓으라는 나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가 자신의 학교가 강제 폐쇄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적십자사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유대인의 탈출을 돕다가 이 수용소에 갇혔고 히틀러 암살 모의에 연루돼 참수됐다.
토요일에 열린 이 행사에 연방정치교육원 및 기념관 관계자, 주민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갓난아이를 데려온 부부, 고교생 손녀를 데려온 할머니도 눈에 띄었다. 손녀 레오니 브레코 양(15)과 함께 베를린에서 온 칸넨베르크 루헤 씨(74·여)는 “내 어머니가 타덴 여사가 세운 학교에 다녔다”며 “손녀에게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알려주고 싶어 데려왔다”고 말했다.
같은 날 밤 베를린 국회의사당 옆 수변무대. 슈프레 강을 사이에 두고 4개의 대형 스크린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모습이 비쳤다. 국회와 정부 역할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자 시민들이 자유롭게 앉아 시청했다. 영상이 끝나면서 ‘독일 국민에게 바친다’라는 문구가 뜨자 시민 100여 명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아들 레안더 프랑크(13)와 함께 앉아 영상을 시청하던 아버지 로베르트 프랑크 씨(43)는 “아들에게 정부와 의회의 역할에 대해 알려주려고 나왔다”고 말했다.
스웨덴 정당들은 매년 7월 외딴 섬에서 일반 유권자들을 상대로 대규모 정책토론회를 연다. ‘알메달렌 위크’라고 불리는 이 행사에는 해마다 시민 3만여 명이 참여한다. 정치를 ‘전쟁’이 아닌 ‘축제’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뿌리내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학교라는 탄탄한 ‘유소년리그’에서 민주주의의 기본기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도록 배려하는 유럽 국가들의 정치교육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 정치적 시민교육 ::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사회적 갈등을 토론과 협의를 통해 해결하는 과정을 가르치는 교육. 이를 통해 법과 질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나아가 국가와 정부의 기능,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시민교육’ ‘민주시민교육’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배운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시민교육’이 가장 적확한 용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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