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비밀스러운 시스템을 갖고 있죠. ‘기계’가 매일 매시간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원래는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기계’는 모든 것을 보게 됐습니다.”
미국 CBS 드라마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Person of Interest)’의 기본 설정이다. 9·11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모든 국민을 감시하는 괴물로 변하자 이를 빼돌려 죽음의 위협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최근 한국에서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스토리는 조폭 세계의 의리와 배신을 다룬 영화 ‘달콤한 인생’에 비유됐고,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는 재난 공포영화 ‘감기’에 비유됐다. 이번 국가정보원의 전방위적인 도·감청 의혹 사건은 빅데이터 스릴러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정원은 메르스로 국민이 죽어나가는 중에도 효과적으로 해킹 프로그램을 퍼뜨리기 위해 메르스 정보 사이트에 악성코드를 심었습니다….” @Baru******님이 15일 트위터에 올린 이 글은 4267회나 리트윗돼 최근 국정원을 언급한 글 가운데 가장 널리 퍼졌다. 실제로 국정원은 이탈리아 해킹팀에서 구입한 감청 스파이웨어를 퍼뜨리기 위해 다양한 루트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오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9일부터 15일까지 트위터 블로그 등에서 국정원을 언급한 문서는 모두 17만3001건이 검색됐다. 이 가운데 트위터 언급량이 98.4%를 차지해 언론이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먼저 확산됐음을 보여줬다. 언급량 추세는 한마디로 가파르다. 12일 1만703건으로 처음 1만 건을 넘어선 이후 13일에는 3만 건, 14일에는 5만 건, 15일에는 6만 건을 훌쩍 넘었다. 상당한 파장이다.
국정원과 함께 언급된 긍·부정 연관어 분포를 보면 긍정어가 14.3%, 부정어가 66.0%를 차지했다. 긍·부정 연관어 상위권에는 의혹, 불법, 부정선거, 더러운, 피싱, 충격적, 공포 같은 단어들이 자리했다.
국정원과 함께 언급된 전체 연관어 1위는 해킹(8만6098건)이 차지했다.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팀과 거래한 ‘팩트’ 자체가 매우 비중 있게 퍼져나갔다. 2위는 프로그램(5만9377건). 국정원이 구입한 것이 악성코드를 이용해 불특정 다수의 휴대전화나 컴퓨터 전체를 원격조종해서 컨트롤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퍼졌기 때문이다. @jinu**님은 “국정원장님, 북한 때문에 해킹 프로그램을 사셨다고요? 북한 공작원을 낚으려고 ‘떡볶이 맛집’과 ‘금천구 벚꽃축제’ 소식을 삼성 관련 URL로 만드셨군요. 북한 지식인을 교란시키려고 서울대 공과대 동창회 명부에 악성코드를 심으셨군요?”라며 국정원의 해명을 정조준해 1113회의 리트윗을 기록했다.
3위에는 국민(2만4031건)이 올랐고, 4위에 대선(2만2156건)이 오른 것은 국정원이 총선과 대선 직전에 추가로 거래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선거 개입 의혹이 제기된 탓이다. 5위는 이 프로그램을 구입한 국가인 이탈리아(2만107건)가, 6위는 박근혜 대통령이 차지했다. 7위에는 5163부대가 올랐는데 이 부대 이름이 5·16군사정변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급속히 퍼지기도 했다. 8위부터 10위까지는 의혹, 구입, 카카오톡이 각각 차지했다.
국정원이 카카오톡, 나아가 삼성 안드로이드폰 자체에 대한 해킹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은 더욱 큰 충격을 받고 있다. “국민 혈세로 국민을 감시한다”는 말이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다. 정보화시대 국가기관에 의한 도·감청 문제는 미래 인권의 핵심 어젠다다. 바이러스 전문가 안철수 의원이 야당의 진상조사위원장이 됐다. 이 문제에 여야가 따로 있어야 할까. 여야가 함께 국민 모두를 디지털 판옵티콘의 감옥에 가두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확실히 남겨야 한다.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빠르고 자칫 한눈을 팔면 경쟁에서 뒤처진다. 우리는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국가의 안보를 지킬 유능한 정보기관을 원하지 국민을 감시하고 댓글이나 다는 정보기관을 원하지 않는다. 국민 사찰 의혹에 대한 진상을 제대로 밝히는 것을 넘어 이참에 미래형 국가정보기관을 재정의하는 일에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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