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개헌 논의의 봉인(封印)을 풀었다. 박 대통령은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에 헌법 개정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 내에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을 설치해 개헌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며 ‘임기 내 개헌 추진’을 공식화했다. 또 “국회도 빠른 시간 안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개헌의 범위와 내용을 논의해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개헌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국정의 블랙홀’이라며 논의에 부정적이었던 박 대통령의 개헌론으로 정치권은 급속도로 개헌 정국에 빨려 들게 됐다.
박 대통령이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 헌법은 과거 민주화 시대에는 적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고 한 지적에는 공감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태어난 현행 헌법은 권위주의적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막는 데 주안점을 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여섯 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만큼 역할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헌론으로 ‘최순실 게이트’ 덮을 순 없다
그럼에도 “이제는 1987년 체제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도약시킬 2017년 체제를 구상하고 만들어야 할 때”라는 박 대통령의 개헌 주장에는 느닷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헌법·정치학자 가운데는 국가 어젠다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데 분노하고,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김재원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불과 2주 전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 등의 개헌론에 “청와대는 지금 개헌 이슈를 제기할 때가 아니라는 게 확고한 방침”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말이 바뀐 2주 사이, 대통령 비선(秘線)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의 비리 의혹은 실체가 있는 ‘최순실 게이트’로 번졌고 대통령 지지율이 사상 최저(25%·한국갤럽)로 떨어졌다. 이른바 ‘좌(左)순실·우(右)병우’ 의혹과 레임덕을 덮기 위해 개헌이라는 블랙홀을 펼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야권의 유력 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어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 의혹 해소와 경제민생 살리기에 전념하라”며 개헌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도 ‘개헌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이 먼저’라고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4년 중임 대통령제로의 개헌에 찬성해 왔던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 역시 “정치적 계산과 당리당략에 따른 권력 나눠먹기를 위한 개헌은 야합에 불과하다”며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통령의 개헌 추진을 쌍수 들어 환영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현재 국민적 의혹이 있는 부분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밝힌 대로 최 씨 문제는 개헌론으로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덮여서도 안 될 일이다. 최 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 44개를 미리 받아봤다는 보도까지 나온 만큼 개헌 논의와 별도로 비선의 국정 농단 의혹은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
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사심이나 정략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대선 주자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과 청와대는 개헌에서 한발 비켜서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정부 내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이 개헌안을 마련’하겠으니 ‘국회의 헌법개정특위는 개헌의 범위와 내용을 논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개헌은 대통령이 주도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이 김재원 정무수석의 설명이다.
안 될 말이다. 대통령이 개헌론을 촉발시킨 만큼 일단은 국회에 공을 넘겨주는 것이 순리(順理)다. 국회에는 김형오 국회의장 시절 만든 개헌안이 있다. 헌법학자인 김철수 서울대 법학부 명예교수도 “국회에 안이 있는 상태고, 국회에서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4년 차에 꺼낸 개헌론에 제동을 건 사람이 다름 아닌 박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에겐 ‘참 나쁜 대통령’이란 어록까지 남겼다. 남이 개헌을 추진하면 ‘나쁜 대통령’이고, 내가 하면 ‘대한민국의 50년, 100년의 미래’를 여는 것인가.
국가 백년대계를 좌우할 개헌은 정치권의 전유물이 돼서도 안 된다. 장석권 전 한국헌법학회장은 “입법부나 행정부 등이 주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독립적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돼도 국민투표를 거치게 돼 있는 만큼 개헌안을 만들 때부터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박 대통령이 ‘임기 3년 8개월이 지난 지금’ 절감한 대로, 5년 단임제는 임기 안에 치적 쌓기에 급급한 대통령의 경험 미숙과 급조된 정책, 정권교체를 겨냥한 야당의 국정 발목잡기, 집권 4년 차만 되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레임덕(정권 말 권력누수)으로 실패한 대통령을 양산했다. 박 대통령에게도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이다. 5년 단임제 때문에 지속가능한 국정과제의 추진과 결실이 어렵고, 북한이 ‘정권만 바뀌면 된다’는 계산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게 만들었다면 국정 운영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5년 단임제의 폐해를 손질할 개헌의 핵심은 권력구조 개편이다. 권력구조는 박 대통령이 공약한 ‘4년 중임제’와 국회의원들이 선호하는 의원내각제,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되 실세 총리가 내정을 총괄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등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권력구조는 결국 국민적 합의에 따라 결정돼야 하지만, 현행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은 분산하고, 비대해진 국회 권력의 책임은 강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차기 주자가 보이지 않는 친박(친박근혜) 세력은 ‘반기문 대통령, 친박 총리’를 골자로 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한다. 여기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려면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난제까지 있어 과연 박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이 가능할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지금이 개헌의 적기(適期)’라는 박 대통령의 판단은 일리가 있다. 역대 대통령마다 임기 후반이면 5년 단임제의 한계를 느끼고 개헌론을 제기했으나 그때마다 차기 유력 대선 주자가 ‘권력 연장 의도’라고 제동을 걸어 무산됐다. 유력한 ‘미래권력’이 가시권에 드러나지 않는 지금이 개헌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이다. 국회의원 가운데 192명이 ‘20대 국회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 회원이어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개헌 의결정족수 200명에 육박한다.
통일헌법 위한 ‘民意의 용광로’ 돼야
한국 정치의 상황은 개헌으로 판을 완전히 흔들지 않고서는 ‘구제불능’일 정도다. 18대의 ‘동물국회’, 19대의 ‘식물국회’를 뛰어넘어 20대 국회는 개원 이후 5개월 동안 4번이나 파행을 겪으면서 쓸 만한 법안 하나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는 ‘동식물 국회’로 전락할 조짐이다. 설령 박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완수할 수 없더라도 본격 논의에 돌입할 때가 됐다.
‘2017년 체제’를 열 새 헌법은 통일한국과 1980년대와는 달라진 기본권 및 복지·환경, 정보화·다문화 사회구조, 지방분권 체제가 반영돼야 한다. 개헌이 어려운 경성(硬性)헌법인 만큼 권력구조만 ‘원포인트 개헌’을 하려 해선 안 된다. 심각한 안보·경제 위기에 대한 대처가 개헌 소용돌이 속에 묻히지 않도록 대통령이 여야 지도자와 ‘대타협’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명한 국민은 내년 대선을 겨냥한 정략적 개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개헌을 이룬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으려면 무엇보다 ‘권력 연장 기도’라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사심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틀을 바꾸는 ‘정초(定礎) 개헌’을 성공시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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