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를 압박해 특정 보수단체를 지원하게 한 ‘화이트리스트’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81)이 대법원 판결로 2심 판단을 다시 받게 됐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13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김 전 실장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함께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54)의 판결도 파기됐다.
대법원은 이번 화이트리스트 재판에 지난 1월30일 전원합의체의 ‘블랙리스트’ 판결을 적용해 “공무원의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해서 ‘의무없는 일’에 해당한다고 인정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 “피고인이 퇴임한 후에는 직권이 존재하지 않아 퇴임 후 범행에 관해서는 공범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판결도 인용했다.
대법원은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할 때 전경련에 특정단체 지원을 요구한 김 전 실장 등의 행위가 공무원의 일반적인 직무권한에 해당하고, 이를 남용했다는 원심의 판단이 맞다고 봤다.
다만 대법원은 전경련이 일반적 사인에 해당하므로, 전경련의 자금지원 행위 역시 ‘의무없는 일’이 맞다고 판단했다. 일반 사인은 공무원과 달리 정부에 속한 기관에서 요구한대로 응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일반 사인일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직권에 대응해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며 “김 전 실장 등의 요구에 따른 전경련 부회장의 자금 지원이 의무없는 일이 맞다”고 밝혔다.
이는 앞선 ‘블랙리스트’ 사건에서의 결론과 다르다. 당시 대법원은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공무원일 경우, 직권을 행사하는 정부기관의 요구에 대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요구에 따른 행위가 ‘의무없는 일’이 맞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대법원은 “행정기관에서 일방이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 요청에 응한 행위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의 자금지원 요구가 강요죄의 ‘협박’으로 볼 수 없다”면서 원심과 달리 강요죄를 무죄로 판단했다. 김 전 실장의 지위에 기초해 어떠한 이익 등을 제공해달라 요구했다고 해서 이를 ‘해악의 고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취지다.
원심은 Δ자금지원 요청 Δ윗선 언급 Δ감액 요청 거절 Δ자금집행 독촉 Δ시민단체 불만 및 민원사항 전달 Δ정기적인 자금지원 현황 확인 등 행위가 해악의 고지에 해당한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전경련 관계자들의 진술이 주관적”이라며 “전경련은 대통령비서실에서 지원 대상 단체와 단체별 금액을 특정해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에서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낀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앞서 1심은 김 전 실장에게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에서 구속했다. 조 전 수석에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1심은 김 전 실장 등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었다.
2심은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에게 1심과 같은 형량을 유지했다. 다만 1심과 달리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정무수석실의 전경련에 대한 자금지원 요구가 전경련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다”면서 직권의 남용, 인과관계 요건이 충족됐다고 판단했다.
한편 대법원은 국가정보원 특별활동비 의혹과 관련한 조 전 장관과 현기환 전 정무수석,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전 정무수석)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선고를 내린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조 전 장관과 현 전 수석은 정무수석 재직 당시 국가정보원 국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 의원과 현 전 수석은 정무수석 재직 당시 이병호 전 국정원장 등과 공모해 국정원 특활비 5억원을 인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경선운동과 관련한 여론조사 비용으로 사용한 혐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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