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국민이 바꾼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주체는 국회의원들이었지만 탄핵을 이끈 원동력은 국민이었다. 국민들은 매주 촛불집회에 나서며 국회의원들에게 전화를 하고 이메일을 보내는 등 정치권을 압박하며 ‘일상 속 참정(參政)’을 실천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주의를 이뤘듯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박 대통령이 무너뜨린 국격을 다시 세우고 있다. ○ “탄핵” 의원들에게 전화 및 메일로 청원
국민들은 신뢰하지 못하는 정치권을 움직이기 위해 행동으로 보여줬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탄핵을 두고 반대하거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촛불을 들고 압박에 나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요청 사이트인 ‘박근핵닷컴’ 등을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강원 춘천에 거주하는 대학원생 곽태진 씨(30)는 “얼마 전 지역구 의원인 김진태 의원에게 탄핵 청원 이메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구미성 씨(25·여)도 “우리 지역구 의원이 아니어도 탄핵소추안 표결을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의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며 “얼마 전엔 집 근처 지하철역인 5호선 거여역에서 박근혜 퇴진 서명운동도 했다”고 밝혔다.
정당에 가입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지난주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 가입했다는 회사원 김자현 씨(27)는 “원래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를 보며 야당이 행동하지 않으면 박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주변에 나처럼 당원 가입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지역사무소나 국회의원실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특히 지난달 29일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 이후 탄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거세졌다. 표창원 민주당 의원이 탄핵에 반대하는 의원들 명단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자 누리꾼들은 이를 실시간 공유했다. ‘조기 탄핵 불가’ 입장을 고수했던 국민의당 의원실 관계자는 “탄핵 표결하라는 전화가 끊이질 않아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전했다. 박지원 전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홈페이지는 1일 항의 민원을 넣으려는 누리꾼들이 몰려 서버 트래픽이 초과되기도 했다.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 시민들은 관련 기사와 누리꾼들의 반응을 예의 주시했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이재현 씨(26·여)는 “페이스북에서 정치인들과 정치 페이지들을 팔로하기 시작했다”며 “뉴스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고 실시간 검색어와 댓글 등을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구미성 씨도 “촛불집회 참여가 어려운 친구들에겐 카카오톡으로 관련 기사 링크를 보내주는 등 상황을 공유한다”고 자랑했다. ○ 촛불집회 참여하며 민심 표출한 국민들
국민들은 무엇보다도 매주 촛불집회에 참가해 민심을 표출했다. 지난 6주간 6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광장에 모여 ‘박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자영업자 김호중 씨(61)는 “한동안 토요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금요일 저녁에는 약속을 잡지 않았는데 앞으론 ‘불금’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뻐했다.
그간 집회 참가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의 부정입학 의혹에 분노한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고등학생 이주나 양(17)은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이지만 나도 의식 있는 시민 중 한 명임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집회에 참가했다. 대학생 신지은 씨(22·여)는 “지난 토요일 아이돌 그룹 ‘샤이니’ 팬 단체의 일원으로 집회에 참여했다”며 “주말엔 음악 공개방송을 가는 등 일정이 많지만 국민으로서 분노가 치밀어 샤이니 응원봉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50, 60대 보수층도 같은 마음이었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을 뽑았다는 최모 씨(69)는 “내가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광장에 나갔다는 게 아직도 놀랍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국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동안은 국민들이 2, 3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때만 존재감을 드러냈다면 지금은 일상 속에서 주권 의식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9일 국회에서 탄핵 가결 선인 200표를 훨씬 넘은 234표가 나온 배경에 이렇게 ‘변한’ 국민들이 있었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순실 사태로 분노한 국민들이 매주 집회에 참가하는 등 행동에 나섰지만 지금껏 별다른 물리적 충돌이 없었다”며 “이는 우리 시민 의식이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걸 증명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시민들의 역량이 이제 정당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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