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박근혜 대통령의 기습 신년 기자간담회 자리. 박 대통령은 최순실의 인사 전횡에 대해 누구나 추천할 수 있던 것인데 몰랐냐는 식으로 답변했다. 예고에 없던 기자간담회도 놀라웠지만 저 말 한마디에 담긴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허망함을 자아냈다. 통치자의 국정 실패 논란을 떠나 ‘인간 박근혜’의 인식이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참 다르다는 뒤늦은 깨달음 때문이었다.
최순실 국정 농단은 ‘통치자 박근혜’의 자질을 의심케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는 열려있는 사람이었는데 네가 몰랐다’라는 식의 항변은 완전 별개의 문제다. 지도자의 인간적 공감 능력에 물음표가 달리는 이유다. 자신의 독특한 삶의 궤적이 일반인이 동의할 수 없는 시각을 만든 것인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무엇이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켰는지 되묻게 된다. 그녀의 모자란 공간을 채워주고도 남았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것만큼은 아버지를 닮아 탁월할 것이란 맹목적 믿음, ‘대선후보 박근혜’를 검증이 필요한 정치인보단 영웅 홍길동쯤으로 여기게 만들었을 정치적 포장,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믿게 만든 일종의 ‘메시아 정치’ 아니었을까.
껍데기가 벗겨지고 실체가 드러난 대통령에게 국민이 속았다며 이제 온갖 주자들이 조기 대선 분위기를 달구고 있다. ‘박근혜 박정희 콤비 플레이’에 이미 한 차례 무릎을 꿇었던 유력 주자는 이번엔 다르다며 ‘준비된 지도자’를 자처한다. ‘세계 대통령’ 출신 주자도 귀국만 하면 무언가 보여주겠다며 단단히 벼르는 모양새다. 탄핵 정국에 재미 좀 본 ‘사이다 정치인’부터 이번에야말로 ‘새 정치’라는 주자까지, 모두 자신이 이 난국을 극복해 낼 능력을 갖춘 대안이라고 자처한다.
하지만 이미 빠르게 돌아가는 조기 대선판을 보면 또 한 번의 ‘메시아 정치’를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우려된다. ‘친노’ ‘비문’ ‘세계 대통령’ ‘새 정치’ 등….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보다는 온갖 정치적 수사가 벌써부터 대선판의 중심을 차지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정책적 구상을 설명하기보단 벌써부터 정치적 합종연횡과 이를 흔들려는 정치공학적 몸부림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딸이란 이유로 대통령의 길을 열어줬던 2012년과 우리는 과연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유권자가 피곤해져야 한다. 대안이 되겠다고 나선 정치인에게 촛불민심 같은 검증의 칼을 들이대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세계 대통령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이미 한 번 대선을 양보했던 전례가 혹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분노의 반대급부가 곧 대권 문을 열어주는 지름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박(反朴)’이 곧 개혁이란 공식이 성립하도록 용인해서도 안 된다. 그저 ‘박근혜의 모든 것’을 뒤집겠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지지율이 오르는 편리함을 제공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함께 그녀를 만든 ‘메시아 정치’와도 작별을 고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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