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어제 ‘태극기’와 ‘촛불’로 두 동강이 난 채 98주년 3·1절을 보냈다. 약 한 세기 전 일제에 맞서 온 겨레가 분연히 하나가 돼 독립을 외친 뜻깊은 날에 후손들이 대통령 탄핵을 놓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느 쪽이라도 나라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이었다고 믿고 싶다. 충돌이나 불상사 없이 행사가 끝난 것도 다행스럽다.
“오등(吾等)은 자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천도교, 불교에서 각 16, 15, 2명이 참가했다. 이들이 종교 지역 이념을 따지며 적전분열(敵前分裂) 했다면 그날의 독립선언은 없었을 것이다. 대의(大義)를 위해 함께 뭉쳤기에 거사가 가능했다. 대의를 위해 소아(小我)를 희생하는 정신이 지금처럼 절실한 때도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서면으로 제출한 헌법재판소 최후진술을 통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해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모아 지금의 혼란을 조속히 극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선의까지 왜곡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에 편지를 보내 지난달 2일 자신의 생일에 받아든 ‘백만 통의 러브레터’에 대해 “고맙고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박사모 측에 “큰 격려가 되었다”고 밝힌 것은 탄핵 반대에 더욱 열심히 나서달라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시위 참가를 자제하고 차분하게 헌재 심판을 지켜보면서 결과에 승복하자고 했다면 국민을 감동시킬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탄핵 찬성 측과 반대 측은 이달 4일과 11일에도 주말집회를 이어간다고 한다. 탄핵이 기각될 경우 민주노총은 총파업, 농민단체는 농기계 시위, 학생들은 동맹휴업 등 강력한 항의행동을 예고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자유청년연합 대표라는 사람은 이정미 헌재 소장 권한대행의 집주소를 공개하고 단골 미용실과 슈퍼까지 언급해 테러를 선동하는 듯한 행위를 했다.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반민주적 폭력 기도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대선 주자들과 정치권, 사회 원로들은 탄핵심판 이후의 대한민국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 바란다. 미국이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헌법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었다.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사실상 이기고도 패배를 선언한 앨 고어 민주당 후보의 결단은 헌법주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 가능했고, 이를 통해 국민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어제 태극기와 촛불시위가 입증하듯 국민의식은 정치인들의 의식보다 한 수 위다. 탄핵심판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대한민국의 헌정질서가 흔들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 정치권과 각계 지도자들이 만나 탄핵심판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나라를 위해 큰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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