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도 패자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헌정사상 처음 탄핵된 것은 누가 이기고 진 것이 아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불행한 역사다. 2017년 3월 10일 역사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헌법 절차에 따라 파면했다. 파면을 요구하는 민의는 평화적이었으며, 절차는 헌법질서에 따랐다. 대통령이라도 법 앞에 평등함이 확인됐다.’
법치(法治)는 당연하고 평범하지만, 이렇게 무섭다. 아버지에 이어 딸 대통령의 비극적 퇴장을 보는 국민의 마음은 안타깝다. 그러나 그 비극이 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최고 권력자가 인치(人治)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국가는 권력자의 자의적 권력행사, 즉 인치를 막기 위해 ‘법의 지배’를 명했다. 이 당연한 진리를 외면해 권력자들은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박 전 대통령은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父女) 대통령이었다. 가장 질색하는 말이 ‘독재자의 딸’이었다. 그래서 ‘법과 원칙’을 앞세웠지만 말과 행동은 달랐다. 국회를 무시해 헌법상 대의민주제를 훼손했고, 여당을 청와대의 하부기관처럼 대했으며, 청와대는 왕정시대의 구중궁궐처럼 여겼다. ‘조국 근대화’의 시대는 지났지만,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를 살았다. 달라진 민주화 세대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 채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그의 비극이자, 나라의 불운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25일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로 시작되는 대통령 선서를 하고 취임했다. 그러나 선서의 첫머리인 ‘헌법 준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탄핵을 결정한 헌법재판소도 이 점을 가장 중시했다. 최순실의 국정 개입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검찰과 특검의 조사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아 용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의 국정 개입을 허용했고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했으며,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박 전 대통령은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했으며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적시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국가와 민족, 지도자에겐 미래가 없다. 5월 초 실시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불행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인치와 대의민주주의 위반을 공격했던 대선 주자들은 대의제의 장(場)인 국회가 아니라 광장의 정치를 일삼았다. 국회가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했던 박 전 대통령의 길을 가려 한다. 오죽하면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아니라 정치권 전체에 대한 탄핵’이란 말이 나오겠는가. 일부 야권 주자들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나 재검토를 외친다. 헌법상 대통령의 선서에 ‘헌법 준수’ 다음으로 규정한 것이 ‘국가 보위’다. 국가의 자위조치에도 반대하면서 과연 대통령 선서를 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러나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2개월 후 당선되는 차기 대통령은 정권 인수위원회도 없이 바로 임기를 시작해야 한다. 지난 대선 때의 검증 소홀이 불행한 역사로 이어진 일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현명한 유권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대선 주자들이 과연 제대로 된 법치주의를 구현할 민주적 소양을 갖췄는지, 여소야대(與小野大) 구조에서 필수불가결한 협치(協治)를 해낼 수 있을지 살펴야 한다. 대선 주자들은 검증의 시퍼런 칼날 위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이른 시일 내에 적어도 외교안보와 경제 수장을 포함한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을 공개해 자신과 함께 검증받아야 한다. 대선까지 앞으로 2개월, 우리 국민은 또 다른 시험대에 올랐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할 수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