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1577만3128표(51.6%)라는 역대 최대이자 1987년 직선제 이후 첫 과반수 득표를 얻어 당선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부녀 대통령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밤 당선인 신분으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모인 2000여 명의 시민들 앞에 섰다. “박근혜! 대통령!”을 연호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박 전 대통령은 “민생 대통령, 약속 대통령, 대통합 대통령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듬해인 2013년 2월 25일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고 떠난 지 34년 만에 청와대에 다시 입성했다. 그리고 4년여 만인 2017년 3월 10일.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남기며 물러났다.
○ 대통령의 딸에서 퍼스트레이디로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회의 의장에 오른다. 당시 9세이던 박 전 대통령은 이후 18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살았다.
프랑스 이제르 주 그르노블로 유학을 떠난 지 반년가량 지난 1974년 8월 15일. 친구들과 여행 중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하숙집에서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급히 귀국길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은 드골 공항에서 고 육영수 여사 사진과 함께 ‘암살’이라는 글자가 실린 신문을 발견했다. 그는 이 순간을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라고 회고했다.
22세였던 박 전 대통령은 육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 아버지를 보좌했다. 매일 아침식사 때마다 함께 신문을 읽고 국정 전반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국정에 대한 식견을 키웠다고 한다.
하지만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행사에 간다”며 청와대를 나선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훗날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쳐 하염없이 오열했다”고 비통했던 심경을 밝혔다. 9일장을 치른 뒤 1979년 11월 21일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났다.
○ 은둔의 18년…박정희 지우기에 저항
이후 박 전 대통령은 근령, 지만 두 동생을 돌보며 살림을 꾸리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다. 더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박정희 지우기’에 나서면서 삼남매는 숨어서 제사를 지낼 정도로 심적 고통이 컸던 시절이었다.
1980년 4월 영남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학생들이 반발하면서 7개월 만에 물러났다. 동생인 근령 씨와 갈등을 빚고 난 뒤 육영재단 이사장도 사직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사람들도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은 정관정요(貞觀政要) 같은 고전이나 불교 경전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은둔의 시간 동안 자신이 겪었던 염량세태(炎凉世態)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이 시기에 박 전 대통령의 곁을 지켜줬던 사람이 바로 최순실 씨(61·구속 기소)였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4일 대국민 담화에서 최 씨에 대해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꾸준히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인 1989년 10월 26일. 국립현충원에 15만 명의 참배객이 몰려들었다. 그는 “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추모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고 나면 감정이 폭발해 자제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벅찬 마음을 일기장에 적었다.
○ ‘보수의 아이콘’이 된 정치인 박근혜
박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2월 10일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정치인 박근혜’의 삶을 시작했다. 정치 입문 동기에 대해 “외환위기 이후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을까’란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밝혔다. 이듬해인 1998년 4월 박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이른바 ‘차떼기’ 파문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침몰 직전의 상황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은 당 대표로 추대된다. 천막당사를 발판 삼아 한나라당은 299석 중 121석을 확보하며 선전했다. 승부사 기질을 발휘한 박 전 대통령은 ‘보수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2006년 6월 당 대표에서 물러날 때까지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이끌면서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하지만 2007년 8월 20일 17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1.5%포인트 차로 석패했다. 그럼에도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라며 ‘아름다운 승복’을 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19대 총선을 4개월 앞둔 2011년 12월 박 전 대통령은 다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는다. 5년 동안 대선 도전을 준비해온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총선에서 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며 비대위원장을 수락했고 이후 당명을 바꾼 새누리당은 152석을 얻는 대승을 거뒀다.
○ 순탄치 못했던 국정 운영, 탄핵으로 막 내려
박 전 대통령은 18대 대선에서 승리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최고 67%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정 운영은 순탄치 못했다. 집권 첫해인 2013년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이듬해인 2014년 4월 16일에는 ‘세월호 참사’가 터지면서 국정 동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해 7·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해 분위기를 일신하는 듯했지만 연말 ‘정윤회 문건’ 파동이 터졌다. 박 전 대통령 지지율은 처음으로 30%대로 내려앉았다.
지난해 4·13총선을 앞두고 여당 내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와 비박(비박근혜)계가 정면충돌했다. 지리멸렬한 여당의 내분에 민심은 돌아서면서 새누리당(122석)은 더불어민주당(123석)에 제1당을 빼앗겼다.
이후에도 ‘협치’와 ‘소통’은 이뤄지지 못했다. 9월부터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의혹 사건이 불거졌고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본격화되면서 박 전 대통령 지지율은 4%까지 주저앉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과 11월 세 차례 대국민 담화, 올해 1월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신년 인사회를 통해 “단 한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0일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결정 선고에서 “피청구인(박 전 대통령)은 최서원(최순실)의 사익 추구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은 “권력은 칼이다. 권력이 클수록 그 칼은 더욱 예리하다…(중략) 정작 큰 권세를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그것을 소유한 당사자이다”(1990년 9월 2일 일기)라고 적었다. 그만큼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채 최순실 씨가 권력을 차용해 사익을 챙길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은 20년의 정치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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