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10시 1분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남색 정장 재킷에 짙은 청색 바지를 입은 박근혜 전 대통령(65·구속 기소)이 피고인 출입구를 통해 들어섰다. 재킷 왼쪽 옷깃에 달린 건 재임 중 자주 달던 브로치가 아니라 수인번호 ‘503’이 적힌 둥근 배지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머리는 재임 당시처럼 올림머리 모양이었다. 구치소에서 파는 1660원짜리 집게 핀과 390원짜리 머리 핀 사이로 머리카락이 몇 가닥씩 삐져나와 있었다. 앞머리 군데군데 흰머리도 보였다.
변호인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박 전 대통령은 천천히 피고인석으로 향했다. 초췌한 기색처럼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유영하 변호사(55) 옆 피고인석에 앉은 박 전 대통령은 맞은편 검사석 검사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잠시 뒤 최순실 씨(61·구속 기소)가 법정에 들어섰다. 상아색 재킷 차림이었다. 최 씨는 이경재 변호사(68)를 사이에 두고 박 전 대통령과 나란히 앉았다.
재판부가 공판 시작 전 법정 촬영을 허용한 3분 동안 방송카메라가 박 전 대통령을 주시했다. 카메라 셔터도 쉴 새 없이 터졌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정면을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6분 피고인 인정신문이 시작됐다. 박 전 대통령이 피고인석에서 일어섰다.
“박근혜 피고인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 “무직입니다.”
“사는 주소지는?” “강남구 삼성동 42-6입니다.”
“본적도 같습니까?” “네.”
“박근혜 피고인 52년 2월 2일생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어 김 부장판사가 국민참여 재판을 원하느냐고 묻자 박 전 대통령은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날 재판은 오후 1시까지 3시간가량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가끔 오른편의 유 변호사와 귓속말을 나눌 때 외에는 대개 무표정하게 정면만 바라봤다. 검사가 50분에 걸쳐 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등 18개 혐의를 담은 공소 사실을 읽는 동안 간혹 한숨을 내쉬거나 법정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부정(否定)’을 의미하는 몸짓이었다. 검사의 설명이 길어지자 박 전 대통령의 두 눈은 거의 감길 듯했다. 지친 표정이었다.
유 변호사는 미르·K스포츠 재단을 설립해 대기업 출연을 받은 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에 대해 “쓰지도 못하는 돈을 왜 받느냐. 동기가 없다”며 검찰의 공소 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김 부장판사가 “변호인은 공소 사실을 전부 부인한다고 했는데”라고 박 전 대통령의 의견을 묻자 “네, 변호인 입장과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김 부장판사가 “추가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지만 “추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한 뒤 입을 닫았다. 박 전 대통령이 이날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글자는 모두 54개에 불과했다.
오전 11시 26분 김 부장판사가 휴정을 선언했다. 박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을 떠나 법정 옆 피고인 대기실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10분 뒤 법정으로 돌아오는 박 전 대통령의 발걸음은 빨랐다. 표정은 담담했다.
최 씨도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해 뇌물을 수수한 혐의 등을 모두 부인했다. 또 박 전 대통령과 일렬로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62)은 박 전 대통령과 최 씨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오후 1시 재판이 끝나자 박 전 대통령은 작은 목소리로 변호인단과 잠시 대화를 나눈 뒤 곧바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재판부와 검찰 측에 인사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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