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판결에 대한 여론조사, 공정 재판 걸림돌 될 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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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 사흘 후인 9일 한 여론조사 기관은 박 전 대통령에게 법원이 선고한 ‘징역 24년’이 적정한 형량인지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업체는 전국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형량이 ‘부족하다’는 응답자가 47.8%인 반면 ‘과하다’는 응답은 28.9%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또 응답자의 29.3%가 무기징역, 18.5%가 검찰 구형량과 같은 징역 30년을 적정한 형량으로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같은 여론조사 기관은 지난달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표했다. 응답자 3명 중 2명꼴인 67.5%가 이 전 대통령을 구속하는 데 찬성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전직 대통령이 연달아 구속돼 재판을 받는 상황은 흔치 않은 일이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사는 언론사나 여론조사 기관이 이런 좋은 소재를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다. 수사나 재판도 다른 국가권력 작용과 마찬가지로 여론의 비판과 감시를 받아야 할 영역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인 형사 사건에 대한 여론조사는 피의자나 피고인의 공정한 수사, 재판을 받을 권리를 과도하게 위협하는 측면이 있다.

미국 연방검사 출신의 변호사 켄들 코피가 쓴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은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 책에서 뉴욕의 한 유명 변호사는 “유명 인사가 피고인이 되면 ‘매우 불이익한’ 상황에 놓이고 잇따르는 수많은 언론보도는 재판에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된다”고 말한다. 유명 인사가 형사사건에 휘말리면 그가 유죄라고 믿게끔 만드는 숱한 보도가 쏟아지는 반면 유리한 기사는 특별히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면 안 나온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 사이에 ‘법전(法典)에 적혀 있는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서, 판사조차 때때로 ‘마치 법전을 집어 들고 피고인을 향해서 집어던지듯(throw the book at defendants)’ 과도한 형량을 선고한다는 이야기다.

이 책이 지적하는 상황은 미국과 다른 형사재판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형사사건 보도는 대개 검찰, 경찰의 브리핑과 그들이 공개하는 증거 위주로 흘러간다. 수사를 받는 쪽은 언론과 접촉할 창구가 없거나, 이후 재판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까 봐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언론이 주도하는 여론의 법정은 ‘유죄 추정의 원칙’으로 움직인다는 건 틀린 말은 아니다.

사법시스템 역시 정의의 여신 디케처럼 두 눈을 가린 채 저울(법과 원칙)만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판사, 검사들이 기자에게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외부에서 어떻게 볼지에 대한 것이다. 법조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법률가 중에는 ‘국민의 눈높이’를 판단의 한 잣대로 언급하는 이도 드물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형사사건에 대한 여론조사가 지금처럼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것은 곤란하다. 하급심 판결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상급심 재판부에 큰 압박이 될 수 있다. 선출된 권력으로부터 인사권으로 통제를 받는 수사기관은 더더욱 여론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국회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한 규제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정의가 아닌 것처럼 유명하다고, 또는 돈이나 권력이 있다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는 일도 정의는 아니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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