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체사상? 교과서마다 비판적 기술
● 역사전쟁? 누굴 이기겠다는 건가
● 교사·학생이 국정교과서 안 쓰면 대혼란
● 교과서 문제는 교육적으로 풀어야
숲속 나무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재정(71) 경기도교육감의 표정은 밝았다. 분홍색 넥타이와 노란색 리본이 눈길을 끈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리본이다.
늦가을 오후, 경기도교육청 앞뜰은 작은 수목원처럼 고요하고 화려했다. 붉은색,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나무들의 자태가 곱다. 이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이념 논쟁’을 하려니 왠지 어색했다.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론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통박했다. ▼ 11월 2일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는 왜 했나.
“그날이 행정고시(告示) 이전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교육감으로서 학생과 학부모, 교사 의견을 몸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청연 인천시교육감도 내 뜻에 동조해 동참했다. 같은 시각 세종시에선 최교진 세종시교육감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의장인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이 교육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에게 독약 먹이는 짓”
▼ 교육감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도내 여론은 어떤가.
“도내에선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민선 교육감으로서 주민의 의견을 대변하는 방법 중 하나로 1인 시위를 한 것이라 부적절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임명직이라면 다르겠지만.” ▼ 학부모, 교사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는데, 통계자료가 있나.
“도내 역사교사가 2300명쯤 되는데, 최근 여론조사 결과 91.58%가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가 직접 교사 대표들을 만나 토론도 해봤다. 학부모들과도 세 차례 만나 의견을 들었는데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 이 교육감은 왜 국정화에 반대하나.
“지난해 6월 지방선거 유세 때 내가 이미 이 문제를 언급했다. 2013년 문제가 된 교학사 교과서가 다시 나오거나 국정화를 추진한다면 학생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짓이니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그는 “내용의 문제를 떠나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주관해 만든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부연했다.
“우리에겐 국정화의 뼈아픈 교훈이 있다. 1974년 유신 시대 때 유신을 미화할 목적에서 국정화를 단행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다.”
▼ 정부와 찬성론자들은 검정제도로는 문제점을 도저히 바로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황교안 총리가 역사교과서를 하나라도 제대로 들여다봤는지 의문이다. 제대로 봤다면 그런 거짓말 못한다. 현행 중학교 9종, 고등학교 8종 역사교과서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을 편다. 교육부의 교과서 집필 지침이 매우 세세하다. 주제만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방향까지 제시한다. 예컨대 주체사상에 대해 이렇게저렇게 비판해달라고 요구한다. 그 기준을 무시하고 쓰면 검정을 통과할 수 없다. 교육부가 검정교과서를 비판하는 건 말이 안 된다.” ▼ 집필자가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쓸 수 있어서 통제가 안 된다고 한다.
“실례를 들겠다. 고등학교 8종 교과서에 수록된 주체사상 관련 내용을 보면 거의 똑같다. 독재를 가능하게 하고 인민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식의 표현이 대부분이다. 아널드 토인비의 말처럼 역사는 확정된 게 아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교과서는 교육부가 제시한 기준 내에서 해석까지 거의 같다.” ▼ 교육부가 역사교과서에 문제가 많다고 말하는 건 자가당착이란 건가.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자기네가 지침 만들어 거기에 맞춰 쓰게 하고 검정까지 해놓고선 이제 와서 잘못됐다고 하니….” ▼ 책임을 집필자들에게 돌린다는 얘긴가.
“그것도 아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한다. 지난 9월 교육부가 내려보낸 공문을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사의 교과 목표 중 하나로 ‘한국사와 관련된 자료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종합적인 탐구활동을 통해 역사적 사고를 키운다’라는 항목도 있다. 그래놓고 한 달 만에 뒤집는 얘기를 한 것이다.” “왜 총리가 나서나”
▼ 국정화 찬성론자들은 건국 과정, 토지개혁 등과 관련해 북한은 우호적으로, 남한은 비판적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사실관계 기술이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는다.” ▼ 6·25전쟁의 책임 부분을 모호하게 기술한 교과서도 있지 않나. 천안함 사건을 다루지 않은 교과서도 있고.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는 6·25전쟁과 관련해 ‘북침’과 ‘남침’의 용어 차이를 설명했다.
“학생들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상당수가 ‘북침’이라고 대답했다. 이걸 두고 큰일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뭐든지 줄임말로 쓴다. 북침은 북한이 침략했다는 뜻이다. 남침, 북침을 혼동해 답변한 아이들이 있다. 어느 교과서에든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적 공격을 시작했다’라고 기술돼 있다.” ▼ 일국의 총리가 국민을 상대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는데, 틀렸다는 얘긴가.
“그것도 납득할 수 없다.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행정고시는 교육부 차관의 전결사항이다. 국무회의 심의사항도 아니고, 국회 입법사항도 아니다. 그런데 왜 총리가 나와 그런 연설을 하나. 뭔가 꺼림칙한 게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나. 총리의 담화문을 다 봤다. 전부 거짓말이다.” ▼ 일고의 가치도 없나.
“그렇다.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10월 31일 여당 대표가 여기(수원) 광교산에 와서 당원 5000명 모아놓고 역사전쟁을 선포했다. ‘보수세력이 힘을 합해 이번 역사전쟁에서 반드시 이기자’고 외쳤다. 아니, 누굴 상대로 전쟁을 하고 누굴 잡겠다는 건가. (교과서 논쟁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변질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 교과서 집필진의 편향성도 거론된다.
“다 이명박 정부 때 교육부에서 선정한 사람들이다. 검정위원들이 수정을 지시해서 수정까지 했다. 출판사들은 교육부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책을 팔지 못하니까. 100% 수정했다.” ▼ 저자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 아닌가.
“그건 자신의 글에 대한 수정을 못 받아들이겠다는 항의 표시였다. 하지만 출판사는 다 수정했다. 그래서 지금 교과서에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美化라고밖에…”
그가 8종 검정교과서의 주체사상 관련 기술을 모아놓은 자료를 내밀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8종 모두 주체사상을 소개한 후 비판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기술됐다. “주체사상은 반대파를 숙청하는 구실 및 북한 주민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금성 교과서 407쪽), “주체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확립하였으며, 이는 김일성의 권력 독점과 우상화에 이용되었다”(천재교육 교과서 318쪽), “주체사상은 유일사상으로 체계화되어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강화되어 김일성 1인 지배체제가 구축되었다”(비상교육 교과서 386쪽)….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황교안 총리는 ‘일부 지도서에 김일성 헌법 서문이 그대로 소개됐다’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서문의 출처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다. 책에 출처를 밝혀놓았다. 북한 헌법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설명하려 그대로 인용해놓은 것이다. 아무리 보좌진이 써줬다 해도 공부를 좀 하고 나와야 할 것 아닌가.” ▼ 진보 성향 또는 좌편향 세력이 국사학계에 많이 포진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한숨을 내쉰 다음 말을 이었다.)
“김무성 대표 말처럼 역사교사의 90%가 좌파라면 어떻게 박근혜 정부나 이명박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겠나. 두 분 다 국민의 뜻으로 선출되지 않았나. 사회엔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기 마련이다. 그걸 다 좌파라고 하는 건 곤란하지 않나. 뉴라이트 계열 역사학자들이 섭섭해할 얘기다.” ▼ 사관(史觀)의 문제는 있지 않나. 이른바 민중사관 같은.
“사관이 다르더라도 사실에 대한 기술은 같을 수밖에 없다. 다만 다양한 사관을 인정하지 않으면 역사학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 정치권력의 입맛에 맞는 사관만 인정한다면 그게 뭐가 되겠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교과서가 바뀐다면 그게 나라인가.” ▼ 어떤 정치적 목적 말인가.
“대통령의 의도는 ‘아버지에 대한 미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 개인적 동기가 크다는 뜻인가.
“2017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다. 거기에 맞춰서라도 아버지 관련 역사를 새로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김무성 대표의 경우 내년에 총선도 있고 차기 대선에 나갈 생각도 있으니 역사전쟁을 일으켜 보수세력을 결집하려는 것 같다.” ▼ 국정교과서가 제작돼 일선 학교에 배포되면 교육감으로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국정교과서이니만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사와 학생들이 안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지….” “도입해도 실효성 없다”
▼ 자칫 교육 현장에서 큰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겠다.
“보통 혼란이 아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다 징계할 수도 없고…. 일단 마지막까지 국정화를 막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끝내 국정화가 될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 막을 수 있겠나. 총리가 담화까지 했는데.
“잘못을 인정한다면 (교육부) 차관이 번복할 수 있다. 총리나 대통령도 국민에게 사과하고 취소하면 된다.” ▼ 박 대통령을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웃음).
“아니다. 난 정말 대통령이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역사적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가 도와드려야 한다.” ▼ 행정고시를 한 이상 현실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지 않나. 1인 시위로 막을 수도 없고.
“뚜렷한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다. 나는 교육감으로서 학교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장학지도를 할 임무가 있다. 아마도 국정교과서를 도입하더라도 교육 현장에서는 별도의 교육이 이뤄질 것이다. 교사의 교육 방법까지 정부가 제약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책을 사느냐 안 사느냐는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다. 강제로 사게 할 수는 없다.” ▼ 그런 경우 어떻게 되나.
“법적으로 다른 교과서는 쓸 수 없다. 하지만 보충자료나 대안자료를 사용할 수는 있다. 교사에게 그런 권한이 있으니.”
그의 말대로라면, 국정교과서를 쓰되 실제로는 다른 보조교재로 수업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교육 현장의 국정화 반대 여론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 다른 지역 교육감들과 이 문제에 대해 협의해봤나.
“교육감들의 1인 시위는 지금도 계속된다. 11월 26일 청주에서 전국교육감협의회가 열린다. 그때 아마도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 찬반 비율이 어떤가.
“전체 17명 중 반대 14명, 찬성 3명이다. 찬성 세 사람은 대구·경북 지역 교육감이다.” ▼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반대가 조금 많긴 하지만 찬반 비율이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다. 국민 다수가 반대한다고 볼 수 없다.
“여론조사는 하나의 흐름이다. 긴 안목에서 봐야 한다. 정부가 저렇게 언론을 통해 일방적으로 홍보하는데도 반대 여론이 높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교과서 문제는 교육적으로 풀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풀 일이 아니다. 기존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검정을 강화하는 방식이 올바른 해법이다. 정부가 학계나 교육현장 여론을 존중해 재고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더는 학생이나 교사가 길거리에 나와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조성식 기자 | mairso2@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12월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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