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는 28일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하면서 “국민 의견을 청취한 다음 현장 적용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정부가 국·검정 혼용이나 국정 교과서 채택 1년 연기 등 어느 카드를 고르든 내년도 역사 교육은 제대로 되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 ‘혼용’ 카드에 출판계 당혹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국정 교과서에 대한 신뢰 기반이 크게 흔들린 상황에서 정부가 꺼낼 가장 유력한 카드로 꼽히는 건 ‘국·검정 교과서 혼용’이다. 그러나 당장 이달 중순까지만 해도 정부가 “오직 국정 교과서만 쓸 것”이란 입장을 분명히 한 터라 검정 역사교과서를 전혀 준비하지 않은 출판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교과서 제작사인 금성출판사 관계자는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교육부의 어떠한 연락이나 지침도 없었다”며 “올해 쓴 역사교과서를 그대로 다시 써도 된다면야 내년 신학기까지 인쇄는 가능하겠지만, 만약 새 교육과정에 맞춘 역사교과서를 만들라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이후부터 올해까지의 교과서는 ‘2009교육과정’에 따라 제작된 것이지만 내년 중1과 고1부터는 새로운 ‘2015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를 써야 한다. 이에 다른 교과목은 모두 올 한 해 새롭게 제작됐지만 역사교과서만은 국정이 예고돼 있었기에 출판사 차원의 제작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출판계 관계자는 “지금은 신학기가 코앞이라 다른 과목 교과서 제작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시기”라며 “실무진이 검정 역사교과서 혼용안에 신경을 쓸 여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역사 과목에서만 2009버전 교과서를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모든 과목이 2015교육과정에 따라 진행되는데 역사만 2009년으로 간다는 건 맞지 않는다”며 “만약 혼용으로 결정 난다면 2015교육과정에 맞는 교과서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학기까지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 민간 출판사의 새 교과서 제작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육부는 다음 달 23일까지 국정 교과서의 최종 운용방안을 결정한다는 입장인데, 만약 검정 교과서를 혼용하려면 관련 고시를 수정해야 한다. 고시 수정을 위해서는 20일 전에 행정예고를 해야 하고, 관보 게재에도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일선 학교의 교과서 검토·선정 및 출판사의 인쇄·배포에 최소 두 달이 걸리는 걸 감안하면 신학기에 맞추기는 무리라는 지적이 있다. ○ 국정 교과서 강행, “현 중3 최대 피해자 될 것”
만약 정부가 당초 입장대로 국정 교과서만을 사용하기로 하면 최종본은 내년 2월 인쇄돼 중고교에 배포된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컸던 만큼 학교 현장에서 1년 내내 혼란이 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실제 서울시교육청은 올 4월부터 국정 교과서에 대응할 교사용 보조자료 집필을 추진해 최근 1차 원고본을 완성하고 검토에 들어갔다. 이 교사용 자료는 시대별로 논란이 되는 10개 주제를 제시하고, 각각의 주제마다 다양한 역사관과 연구 결과, 그에 따른 사료를 정리해 보여주는 형태로 구성됐다. 개별 주제의 말미에는 교사들이 참고할 수업안과 수업 예시를 첨부해 해당 자료를 활용한 토론식 수업이 가능토록 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수정·보완 작업을 거쳐 내년 5월 학교 현장에 배포할 예정”이라며 “‘한 가지 정답’을 요구하는 국정 교과서와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는 보조 자료가 공존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토론 수업이나 수행평가에서는 다양한 사관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생이 좋은 평가를 받겠지만, 정작 내신 필기시험이나 수능시험에서는 교과서의 내용만 정답이 되는 모순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논쟁이 커지자 역사를 수업 과목으로 편성하지 않는 학교도 크게 늘었다. 시교육청에 따르면 서울시내 384개 중학교 가운데 내년 중1 시간표에 역사를 넣은 학교는 19곳에 불과하다. 시교육청은 “30일 19개 학교장 간담회를 열어 이 학교들도 모두 역사 수업을 미편성하도록 제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광주시교육청 관내 중학교들도 대부분 역사 수업 편성을 중2·3학년으로 미뤘다. 교육계 관계자는 “1년만 버티면 대선이고, 정권이 바뀌면 국정 교과서는 곧장 폐기될 것이란 복안이 깔린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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