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家가 내 삶을 책임져 준다니, 굳이 힘들게 노력할 필요 있나
평등사회 외치며 좌파로 전향할까
비판과 문책 없는 진영논리 위험… ‘제왕적 청와대’ 줄이고 책임정치를
아무래도 전향을 해야 할 것 같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 책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나는 우파라고 여기며 살았다. 나도 내 딸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다. 그런데 국가가 내 삶을 책임져 준다니 굳이 애쓰고 살 필요가 없어졌다. 개인보다 사회, 자유보다 평등이 중요하다고 외치기만 하면 정의로운 좌파에 낄 수 있을 거다. 강남에 아파트가 몇 채 있든, 애들이 자사고를 나왔든 괘념할 것 없다. “아이의 선택이었다”며 가슴 아픈 척하면 양심적 좌파로 보일지 모른다.
‘댓글 테러’의 시대, 요즘 좌파의 큰 미덕은 좌파끼리 절대 비판하지 않는 무조건적 연대의식이다. 참여연대 출신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도덕성 논란 끝에 현 정부 8번째로 낙마했는데도 청와대에선 인사라인 문책설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행위 중 어느 하나라도 위법하거나 의원들 관행에 비춰 도덕성에서 평균 이하라고 판단되면 사임시키겠다”는 말로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쐐기를 박았다.
김기식이 의원 임기 만료 직전 자기가 속한 ‘더좋은미래’ 단체에 후원금 땡처리를 한 데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위법으로 결론 내자 같은 단체 의원 13명은 즉각 비난에 나섰다. 국민이 맡긴 입법권으로 선거법을 바꿔 사적 보복을 하겠다는 국정의 사유화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 당시 이기준 교육부총리의 판공비 과다 지출을 폭로하며 ‘정권 차원의 도덕성’까지 공격해 임명 사흘 만에 퇴진시켰던 당시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도덕성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청와대의 부인(否認)에도 불구하고 홍일표 청와대 행정관의 부인(夫人)이 남편과 감사원 국장이라는 자신의 공직을 이용해 해외연수를 따낸 사실도 드러났다. 부인은 대기발령을 받았으나 ‘청와대 개입설’이 제기된 홍일표는 건재하다. 심지어 2012년 대선 때 문 캠프에서 조직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대응을 하다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은 사람도 지금 의전비서관으로 남북 정상회담 준비에 분주하다.
그러고 보면 좌파로 살기는 참 쉽다. 어떤 잘못이 있어도 문책은커녕 감싸주기 바쁜 온정적 사람 사는 세상이다. 문 대통령도 2012년 대선 패배에 2015년 4월 재·보선 패장이었지만 책임진 적이 없다. 18대 대선평가보고서를 냈던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당의 치명적 결함은 정당의 생명인 책임윤리가 고갈됐다는 점”이라며 자유공론이 없는 현실을 개탄했을 정도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우파의 도덕성 평균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왜 과거 집권세력 뺨치는 반칙을 저지르고도 잘못했다는 의식조차 없는 건지. 2011년 한국정치학회보에 실린 '노무현 정부 386정치인들의 도덕적 실패에 대한 연구'는 구약성경 속 다윗왕의 '밧세바 신드롬'에서 답을 찾는다.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집단적 도덕성’을 입증받았다고 믿는 386정치인들은 제도권 정치와 기존 사회질서를 불신한다. 이들이 집권에 성공하자 정권의 정당성과 전승(戰勝) 파티의 해방감에 취해 권력 남용, 도덕적 해이에 쉽게 빠졌다는 것이다.
민중민주주의를 추구한 그들은 노무현 정부 도덕성의 밑바닥까지 보이며 정권을 잃었다. 그럼에도 진보적 기획으로 민족의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과 정서는 여전하다. 정서주의에선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지적이다. 순결한 좌파의 오류는 부패한 우파보다 깨끗하다. 말을 바꾸고 법을 위반하고 갑질을 하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것도 이 때문일 터다.
책임지지 않는 사랑이 불행을 낳는다면,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제왕적 통치를 낳는다. 꼭 1년 전 오늘 문 후보는 TV 대선토론회에서 “헌법만 지키면 제왕적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다”며 현행 헌법의 3권 분립을 강조했다. 지금은 헌법기관인 선관위가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방자한 질의를 받고, 여당한테는 정치적 해석을 했다는 비난을 받아 3권 분립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내 삶은 책임져주지 않아도 좋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권력은 자칫 전체주의로 갈 위험이 있다. 내 딸의 삶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왕적 청와대권력은 과감히 줄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하루에도 몇번씩 비서들 보고만 받을 것이 아니라 장관들과 일하며 국회의 견제를 받는 ‘책임 정치’로 가야 한다.
김순덕 논설주간 yuri@donga.com
본보 4월 23일자 A30면에 소개된 ‘노무현 정부 386정치인들의 도덕적 실패에 대한 연구’ 논문 필자인 김태승 씨는 인하대 교수가 아닌 서울대 행정대학원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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