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윤일병을 구하라]
<下>인간 대접하는 군대로 ―民도 참여하는 ‘인권 방패’ 만들자
외부의 감시 거부하는 軍체제가 근본문제
“군인은 제복입은 시민”… 독일처럼 軍개혁 필요
독립된 민간 옴부즈맨에 방문조사 권한 보장을
《 너무 늦게 알았다. 우리는 동료 병사의 가혹행위와 간부의 방치, 군 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윤 일병, 이 상병, 임 이병을 구하지
못했다. 때늦은 파장 끝에 확인된 것은 수많은 군 문화 개선 구호 속에서도 병사들의 인권은 철책 속에 감춰진 채 짓밟혀 왔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현직 장병과 군 관련 단체 및 기관, 전문가에게 자문했다. 이들은 ‘제2의 윤 일병’을 구하기 위해
‘민간 참여’와 ‘3중 보호막’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
윤 일병이 군홧발 아래 스러졌던 28사단 포병연대 의무대는 본부대와 물리적으로 떨어진 ‘고립 지역’이었다. 간부 여럿이 함께 주둔하는 다른 부대와 달리 문제의 의무대에서 책임 간부는 폭행에 가담했던 하사 한 명뿐이었다. 사단장과 군단장조차 ‘사각지대’로 표현하는 곳이었다. 임 이병이 성 고문을 당했던 곳도 본대와 떨어진 의무대였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외부와의 차단’ 조건이 가장 심각했던 곳에서 주로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철저히 고립된 상황에서 외부 감시를 받지 않는 군 체제가 근본 문제이고, 그 정도가 특히 심각했던 곳에서 ‘위기 신호’가 실제 폭발한 셈이다.
“군인은 ‘제복 입은 시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대적인 개혁개방을 실시한 독일 군인 법제의 기본 원칙이다. 일시적으로 제복을 입었을 뿐 시민의 기본 인권은 보장된다는 이 원칙에 따라 독일 군대는 민간이 참여하는 공식 감시기관의 통제를 받는다. 1957년 공포된 ‘연방의회 군사 옴부즈맨에 관한 법률’은 의회 직속 기관인 군사 옴부즈맨에서 군 복무자의 청원을 받아 관련 정보를 군으로부터 제출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35세 이상 독일 국민이면 누구나 추천을 받아 옴부즈맨으로 활동할 수 있다. 한발 나아가 사전 고지 없이 군부대 현장을 직접 방문 조사할 수 있는 권한도 보장돼 있다.
그러나 한국군에 이 같은 ‘개방’은 멀고 먼 남의 나라 이야기다. 2005년 28사단 총기난사 사건 이후 설치된 국내 군 옴부즈맨은 실질적 권한 없이 방치되고 있다. 잇따르는 사건으로 군의 곪은 부분을 외부에 개방해 감시를 받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단순히 ‘제도 정비’ 단계에서 민간 전문가에게 자문하는 게 아니라 실질 운영에 외부의 독립적인 인사를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해 온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군이 ‘오픈(개방)’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군 내부 상담관들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심리 검사 자문은 외부 전문가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해 왔지만 실제 군 내부에서의 운영에 일반 민간인 전문가들이 투입돼야 실질적인 문제가 드러날 수 있다”고 곽 교수는 지적했다.
박성남 국가인권위원회 기획조사팀장은 “국방부 차원에서 외부 기관과의 협의체를 수용하고 스스로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 일병 사고 이후 군 당국의 육군 가혹행위 전수 조사에서 유사 사례 3900건이 적발됐지만 각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징계 처분 결과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꼭꼭 숨기는’ 군 풍토에 분노한 일각에선 “이런 식으로 내부에서 처리할 게 아니라 아예 매일의 자살 사고 병사 수를 국방부 홈페이지에 게재해야 한다” “자꾸 이런 문제가 반복된다면 모병제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 병사부터 장교까지 부대에 ‘3중 보호막’을 ▼
① 구타 보고도 신고 안하면 ‘공범 처벌’ 인식 확산 ② 병사들 생활 잘아는 부사관에 인권교육 철저히 ③ 적극적으로 진실 밝히는 장교엔 人事 인센티브
현역 장병과 전문가들은 군부대 내의 각 구성원들도 구타·가혹행위 감시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①최초 목격자, 동료 병사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사관학교에선 장교들이 자격이나 품위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때 이를 목격한 동료에게 ‘의무 신고’ 책임을 지운다. 신고를 하지 않으면 그 동료도 처벌 대상이 되는 제도를 일선 병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 일병 사건을 방조하고 딱 한 대 때렸다가 불구속 기소된 A 일병의 사례처럼 단순 방조 수준의 행위도 ‘공범’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동료 병사들이 ‘1차 보호막’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②병사와 부대끼는 부사관 교육 확대
행정보급관·의무지원관 등 일반 병사와 접촉이 가장 많은 간부들은 원사·상사·중사·하사 계급에 해당하는 부사관이다. 부사관들은 병사와 병영 생활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핵심 간부다. 병사 근무 중 지원한 부사관도 많아 병사 실태를 잘 파악한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도 그러면서 배웠다”는 식으로 넘어가거나 오히려 폭행에 가담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김대영 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은 “하급 간부는 행정이나 작업 업무에 치이다 병사관리에 신경을 못 쓰는 구조”라며 “부사관들에게도 군부대 폭력 사례에 대해 철저히 교육하고 리더십을 심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성남 인권위 기획조사팀장은 “국방부에서 군 간부 양성이나 재교육 시 의무 과목으로 지정하는 ‘통제 과목’들이 있다. 인권 과목은 수년 전 이 과목에서 제외됐다”며 “간부급들에 대해서도 병영 문화와 인권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③장교에겐 문책보다 ‘진실 보고’ 장려해야
직접적인 병사관리 책임은 소위 중위 계급에 해당하는 소대장 중대장에게 있다. 하지만 부대 안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보직해임 등 처벌이 뒤따르고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관행 때문에 장교들이 진실을 밝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당장 사건을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방부 부대관리훈령 제5조 1항의 ‘부대지휘에 관한 모든 책임은 지휘관에게 있다’는 원칙에서 이 같은 관행이 이어져 온 것이다.
문무철 국민권익위원회 국방보훈민원과 조사관은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적극 대응하고 해결한 지휘관은 오히려 승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군 인사법이나 훈령 등의 개정, 부대별 내부 지침 등을 통해 적절히 사고 처리를 한 지휘관에게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단지 사고가 났다는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문화를 고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형 사고에 대해 윗선 지휘관이 책임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현장 지휘관들이 상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진실을 외면하는 현상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강원 육군 모 부대 예비역 장교 A 씨(26)는 “장교들은 부하 병사들을 도구로 취급하지 말고 인격체로 존중하며 책임감을 갖고 돌봐야 한다”며 “병사들의 생활 속 문제의 실체를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 역시 장교의 책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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