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28사단 ‘윤 일병 폭행 사망 사건’을 계기로 폭력과 부조리에 물든 병영 환경의 개혁을 더는 군(軍)에 맡겨선 안 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병영 악습을 쉬쉬하고 축소하는 군내 집단이기주의와 보신주의가 근절되지 않는 상황에서 군의 ‘셀프 개혁’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실제로 군 당국은 1987년 ‘구타·가혹행위 근절지침’ 제정을 시작으로 올해 ‘병영문화 선진화 추진계획’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병영혁신’, ‘군 개혁’을 발표했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총체적 실패로 끝났다. 병영혁신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구호만 요란한 병영개혁
군 자체 개혁은 구호만 거창했을 뿐 ‘용두사미’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과 병영여건 개선을 내건 각종 대책의 주요 내용들도 대부분 재탕, 삼탕에 그쳐 ‘보여주기식 개혁’, ‘전시 행정’에 그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신병영문화 창달’(1999년), ‘선진병영문화 VISION’(2005년), ‘전투형 군대 육성을 위한 병영문화 혁신대책’(2011년), ‘병영문화선진화추진계획’(2012년) 등 정권과 시대에 따라 군 당국이 추진한 병영개선 대책은 간판과 포장만 바꿨을 뿐 그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군 고위 관계자는 “윤 일병 사건은 군 주도 병영개혁의 한계를 극명히 드러낸 것”이라며 “군에만 맡겨선 내부 반발과 집단 이기심 등으로 병영 혁신은 요원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 인권단체 등 민간·시민 차원에서 장병 인권 향상과 병영 적폐를 일소하기 위해 군에 과감히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부대 관리와 전투력 향상이 혼연일체 돼야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최근 최전방 부대를 찾아 “부대(병영) 관리가 잘돼야 실전적 훈련이 가능하고 싸워 이길 수 있는 강군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됐을지 의구심이 남는다. 아직도 일선 부대에는 병영 개선과 전투형 강군 육성을 상반 관계로 인식하는 지휘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두 사안 가운데 한 측면을 강조한 정책을 추진한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1월 논산훈련소의 훈련병 인분 가혹행위 사건, 같은 해 6월 육군 28사단 최전방초소(GP)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병영문화 개선 정책을 쏟아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군사소위원회도 이때 만들어졌다. 군 관계자는 “당시엔 사건사고를 줄이기 위해 무리한 훈련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이런 조직들은 대폭 축소·폐지됐다. 같은 시기 국방부는 ‘군대다운 군대’, ‘군 재조형 작업’을 화두로 예하부대에 전투형 강군 육성을 주요 목표로 강조했다.
또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군 당국은 ‘창끝부대’, ‘정예강군 육성’을 화두로 내걸었다. 일선 부대에서 대대장을 맡고 있는 한 지휘관은 “2006년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부대 입간판이 2008년 이후엔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시대와 정권에 따라 병영 개선과 강군 육성 정책이 갈팡질팡하면서 일선 지휘관들은 상부 지시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 ‘군대 좋아졌다’는 시각이 폐습의 주범
최고 지휘관부터 병사까지 군과 병영에 대한 근본적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군대가 과거보다 많이 좋아졌다”, “난 과거에 더 고생했다”는 그릇된 생각이 군을 개혁과 변화의 무풍지대로 만드는 주범이라는 의미다. 국방부 관계자는 “병영 악습과 부조리가 계속되는 주된 이유는 장교와 병사 등 군내 구성원들의 ‘본전 생각’이 근절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영 사건사고를 군의 치부로 여기고, 이를 공개하는 것을 군기 문란 행위로 보는 그릇된 인식도 변해야 한다. 육군 25사단장을 지낸 서종표 전 국회의원은 “군기는 부대원 간 전우애와 일체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실질적인 병영문화 개선을 통해 ‘진짜 군기’가 정립돼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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