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폭력과 가혹행위에 찌든 병영 악습과 부조리 근절을 위한 혁신 방안을 발표했지만 ‘기대 이하’라는 평가가 많다. 과거 군 부대의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제시한 각종 대책의 ‘백화점식 나열’ ‘우려먹기 수준’이 되풀이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이번 개선안이 최종 확정안은 아니고, 군이 12월 말에 최종안을 제출할 예정이지만 충분한 반성을 담지 않았다는 것. 군 당국과 수뇌부가 육군 28사단 ‘윤 일병 폭행 사망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우리 병영의 위기 상황을 여전히 가볍게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국방부는 이날 회의에서 19개의 단기, 중장기 과제로 이뤄진 병영혁신안을 보고했다. 여기엔 △장병 기본권 제고를 위한 군인복무기본법 제정 △구타 및 가혹행위 관련 신고 포상제도(군파라치) 도입 △현역 판정기준 강화 및 현역복무 부적합자 조기 전역 △일반전방소초(GOP) 부대의 가족 면회 허용 △취약지역에 폐쇄회로(CC)TV 확대 설치 등이 들어 있다.
‘군파라치’ 제도의 경우 구타 및 가혹행위를 신고한 장병에 대한 불이익과 보복을 막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GOP 부대 면회는 해당 병사의 부모나 가족이 2주 전에 신청하면 영내에서 면회할 수 있도록 했다.
국방부가 이날 발표한 대책 중엔 본보가 제안한 초급 간부 및 부사관 리더십 강화(본보 8월 6일자 A3면, 8월 12일자 A4면)와 부대원 전우애 의식교육 강화(본보 8월 13일자 A10면) 방안도 포함됐다.
또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한 병사가 인터넷으로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국방통합 인권사이버시스템’을 구축하고, 병사와 간부 및 부모 대표로 이뤄진 ‘인권 모니터단’도 운영하기로 했다. 장병 인권보장과 인성교육 강화 차원에서 인권 교관을 현 250명에서 2000명으로 늘리는 한편 인권침해에 대한 처벌도 강화된다. 아울러 최전방초소(GP)와 GOP 부대의 소대장을 장기복무 또는 연장복무 희망자 위주로 선발해 진급 혜택을 주고, 소대장 직위에 우수부사관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밝혔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병영혁신안 중 다수가 과거부터 추진되다 흐지부지되거나 효과를 거두지 못한 미봉책이라는 지적이 있다.
가령 군인복무기본법 추진은 2005년 ‘육군훈련소 인분가혹행위사건’을 계기로 국방부가 입법 추진을 공언했지만 아직도 법제화되지 않은 사안이다. 군 당국은 국회와의 협조 문제를 이유로 들지만 정책 추진에 소극적이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소원수리 및 고충처리제도 개선과 장병 언어순화 운동, 초급 장교 및 부사관 리더십 향상 등도 병영문화 개선의 ‘단골 메뉴’다.
병영 폭력과 부조리를 예방하기 위한 ‘국방 옴부즈맨’ 등 독립적인 외부 감시기구 설치 방안은 아예 검토 대상에서 빠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과도한 권한이 부여되는 옴부즈맨 제도는 군 본연의 임무에 지장을 줄 수 있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휴대전화 허용 및 사이버지식방의 확충 방안, 열악한 병영 여건의 개선 대책도 포함되지 않았다. 왜곡된 위계질서로 이어지는 계급체계 개편 등 근본적인 대책도 논의되지 않았다. 군 관계자들도 “근원적이고 실효성 있는 처방을 도입해야 하는데도 대부분 간판과 포장만 바꾼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에게 ‘군 셀프개혁’의 한계를 재확인한 것으로 비칠까 우려된다는 군내 여론도 적지 않다.
이날 회의에선 백승주 국방차관 주관의 토론회도 진행됐다. 구홍모 육군 7사단장(소장)은 “일과 후에 완전히 퇴근하는 개념의 생활관을 도입해 병사에 대한 통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성일 공군 군종실장(대령)은 “구타 가혹행위를 신고한 병사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하고, 병사들의 종교 활동 등 주말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육군본부 법무실장이 육군 검찰관들의 내부 전산망에 윤 일병 폭행사망 사건과 관련해 “여론에 밀려 예하 (28사단) 검찰관의 법적 양심에 기초한 법적 판단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점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이어 사건을 처음 조사한 28사단 검찰관에 대해 “한 달여에 걸친 폭행, 가혹행위와 사망의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가능한 범위에서 완벽하게 특정해 공소를 제기했다”고 두둔하고 나섰다. 또 “참모총장이 사퇴했음에도 국민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으며 정치권과 언론 시민단체는 거기에 편승해 계속 기름을 붓는 상황”이라며 “불법으로 수사 기록을 유출하고 검찰관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응분의 책임을 지우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고에 대한 자성보다는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육군 측은 “일부 표현으로 인해 오해를 발생시키고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서는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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