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이런 식의 행동이 반복된다면 한일 간 협상 진전에 큰 어려움이 있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24일 기자들과 만나 일본 수출규제 및 지소미아와 관련한 양국의 합의에 대한 일본의 반응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인 정 실장이 직접 나서 예고 없이 브리핑을 할 정도로 일본을 향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특히 청와대는 이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을 다룬 일본 언론 보도와 관련해 “지도자로서 양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말이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일시 봉합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감정의 골이 여전히 깊다는 점과, 후속 협상도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 공개적으로 日 주장 반박한 정의용
정 실장은 이날 일본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일본 정부의 반응과 경제산업성의 발표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정 실장은 우선 “한국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절차 중단을 통보해 협의가 시작됐다”는 경산성의 발표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사전에 이러한 약속을 해서 협의가 시작된 것은 절대 아니다. WTO 제소 절차 정지의 결정은 모두 조건부였고, 모두 잠정적”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협상 상황에 따라 WTO 제소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정 실장은 또 22일 합의 내용 발표 직후 경산성이 “반도체 원료 등 3개 품목을 개별적으로 심사해 수출 허가 여부를 판단한다는 방침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사전 조율한 내용과 완전히 다르다”며 “(일본의 방침에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애당초 합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청와대는 경산성의 이 발표 내용에 대해 일본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고, 일본 측이 “경산성에서 부풀린 내용으로 발표한 것에 사과한다”고 밝혀왔다고 전했다. 정부의 항의와 일본의 사과는 23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상 간 회담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외무성의 한 간부는 (한국 정부에 사과한) 그런 사실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며 “(청와대의 일본 비판은) 국내 비판을 피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 이례적으로 아베 발언 공개 문제 삼은 청와대
청와대는 아베 총리의 발언도 문제 삼았다. 이날 일본 아사히신문은 아베 총리가 22일 양국 발표 직후 주위에 “일본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미국이 상당히 (압박이) 강해 한국이 포기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지극히 실망스럽다. 그게 일본 정부의 지도자로서 과연 양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말인지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일본 일부 언론 보도는 실망스럽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본 고위 지도자들의 일련의 발언이다. 매우 유감스러울 뿐 아니라 전혀 사실과도 다른 얘기로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려 한 것 아닌가”라고 했다.
정 실장은 브리핑 말미에 “영어로 ‘트라이 미(Try me)’라는 말이 있다”고 운을 뗐다. 정 실장은 “어느 한쪽이 터무니없이 주장을 하면서 상대방을 계속 자극할 경우 ‘그래? 계속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경고성 발언”이라며 “‘유 트라이 미(You try me)’, 제가 그런 말을 일본에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일본을 향해 ‘더 해볼 테면 해보라.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공개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 국내 여론 감안해 서로 승리했다는 韓日
이런 거친 공방은 한일 정부 모두 ‘포스트 지소미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국 여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정 실장은 ‘일본 외교의 승리’ ‘(일본의) 퍼펙트게임’이라는 일부 일본 언론의 보도에 대해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반박하며 “이런 일련의 행동은 외교협상에서 신의성실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큰 틀에서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원칙과 포용의 외교가 판정승한 것”이라고 말했다. 윤도한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도 이와 관련해 “일본 측의 시각으로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는 국내 언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며 “논리도, 근거도 없는 보도”라고 했다.
이에 한 외교 소식통은 “외교는 승자와 패자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일 정부는 나란히 자국 여론만을 의식해 ‘우리가 이겼다’고 소리치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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