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국정감사가 이틀간 진행됐다. 문재인 정부는 문 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한 대로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 촛불은 ‘1987년 체제’ 이후 켜켜이 쌓인 정치의 구태(舊態)를 털어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다. 국정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틀을 마련하는 데 국정감사만 한 장(場)이 없다. 그러나 새 정부의 국감을 지켜본 심정은 착잡하다. 과거 정부의 국감 구태가 답습됐을 뿐 아니라 더 나빠졌다. 전임 박근혜, 전전(前前)임 이명박 대통령이 전전전(前前前)임 노무현, 전전전전(前前前前)임 김대중 대통령과 맞서 싸우는 유례없는 과거사 전쟁이다.
어제 방송통신위원회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공영방송 개혁’을 내세워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여당 추천을 받은 KBS, MBC 이사진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에 자유한국당은 이효성 방통위원장을 ‘적폐위원장’으로 부르며 거칠게 항의했다. 보건복지부 국감에서 여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보건복지 의료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야당은 ‘문재인 케어’(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맞섰다. 그제 산업통상자원부 국감장에선 전·현직 대통령 4명의 이름이 종일 오르내렸다. 야당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원전의 우수한 성능과 안전성을 강조하는 영상을 돌리며 문 대통령의 탈(脫)원전 정책을 비판했다. 여당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 해외 자원개발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생산성이라곤 없는 과거 털기 국감이다. 우리가 지금 이럴 땐가. 이번 국감을 과거사를 파는 데 써버리기엔 작금의 국내외 사정이 너무 위중하고 다급하다. 북한은 핵·미사일 위협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발(發) 통상 압박과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우리의 안보와 경제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청년실업과 경기 침체, 저출산과 고령화로 안으로도 곪아 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달 말까지 진행될 국감에서 과거사 다툼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민주당은 지난달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적폐 청산’을 아예 국감 기조로 채택했다.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안보·인사 무능을 ‘신(新)적폐’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정책을 ‘원조 적폐’로 각각 규정하고 맞불을 놨다. 국감을 준비하면서부터 골대를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로 잡은 것이다.
말 그대로 ‘적폐’는 청산돼야 옳다. 그러나 청산의 주(主) 대상이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된다면 정치 보복으로 비치기 쉽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적폐 청산은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적폐 청산이라 쓰고 정치 보복으로 읽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여권부터 자제해야 야당이 20년이 다 된 김대중 정권까지 걸고넘어지는 행태를 막을 수 있다.
국정감사가 끝나고 열흘 뒤면 문재인 정권 출범 반년이다. ‘촛불 프리미엄’도 약효를 다하고 실적으로 승부해야 할 진실의 시간이 다가온다. 정치권은 더 이상 과거에 매몰돼 있을 시간이 없다. 여야가 무섭게 싸우려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위기와 불안한 미래를 놓고 맞붙어야 한다. 늘 그렇듯, 과거와 싸우면 잃는 것은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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