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동요는 없었다. 지나칠 만큼 차분했다. 북한이 서부전선에 기습 포격 도발을 감행한 다음 날인 21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풍경이었다. 이날 북한은 22일 오후 5시까지 대북 심리전 확성기 방송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추가 도발을 예고했다. 하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접경지역 주민에 국한된 얘기인 듯했다. 성숙한 시민의식 때문일까. 아니면 심각한 안보불감증에 빠져 있는 걸까.
21일 서울역과 재래시장 등은 평소와 다름없이 승객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학교나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주말을 앞두고 다소 들떠 있을 뿐 북한의 도발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거와 같은 극성스러운 생필품 사재기 같은 현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의식이 성숙해졌다고 단정하긴 이르다. 온라인에서는 과격한 주장과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온한 거리 분위기와 달리 금융시장은 패닉(공황) 국면에 빠졌다. 코스피는 전날보다 38.48포인트(2.01%) 내린 1,876.07로 마감해 2013년 8월 이후 2년 만에 최저치를 나타냈다.
코스닥지수는 장중 한때 6.3% 폭락했다가 4.52% 내린 627.05로 거래를 마쳤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도 전날보다 9.9원 급등한 달러당 1195.0원으로 마감했다. 이는 2011년 9월 이후 3년 11개월 만의 최고치다.
▼ 시장-마트 북적, 유흥가도 “불금”… 의식 성숙? 안보 불감? ▼
北도발, 동요없는 국민들
북한의 서부전선 포격 도발 이튿날인 21일 휴전선 인근은 일촉즉발의 초긴장 상태였지만, 국민은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과거와 다른 성숙한 시민의식 때문이라는 평가도 나오지만, 지나친 차분함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남북한이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강경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 동아일보는 이날 대한민국의 단면을 시간대별로 취재했다. ○ 대피소는 초긴장 vs 북적거리는 시장
낮 12시경. 경기 연천군 중면 삼곶리 민방공대피소에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주민 40여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앞서 오전 1시경 추가로 내려진 긴급 주민대피령 때문인지 불안감이 한껏 고조된 모습이었다. 창문이 없는 대피소 안은 더운 기운과 습기가 가득했다. 어른들은 연방 부채질을 하며 스마트폰으로 북한 관련 뉴스를 챙겨봤다. 주민 이명록 씨(68)는 “북한이랑 가까운 이 동네에 50여 년간 살면서 총소리를 워낙 자주 들어 이골이 났지만 이번처럼 대피소에서 초긴장 상태로 밤을 보낸 건 처음”이라며 불안해했다.
같은 시간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뒤엉켜 북새통이었다. 사물놀이패가 꽹과리와 소고 등을 치며 골목으로 들어서자 몇몇은 어깨를 들썩이며 흥겨워했다. 광장시장에서 40년째 먹거리를 팔고 있다는 이희순 씨(65·여)는 “예전에 북한에서 귀순한다며 비행기가 넘어올 때는 사람들이 꽤 웅성거렸다”며 “요즘은 북한이 어떤 행동을 해도 어차피 시장에 올 사람들은 다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중국인 리쯔민 씨(21·여)는 “한국에 오자마자 북한이 공격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지만 한국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길래 정해진 일정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오후 1시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2층 로비에는 60여 명이 앉아 있었다. TV에서는 북한 도발 관련 속보가 계속 이어졌지만 집중하는 시민은 많지 않았다. TV를 지켜보던 허모 씨(76)는 “(북한이 예고한) 내일 오후 5시 전에 선제공격을 하자”고 호전적인 주장을 폈다. 하지만 로비에 있던 대다수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는 등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비슷한 시간 서울역 1층 로비 풍경도 영등포역과 비슷했다. 대구 고향집에 간다는 대학생 임모 씨(26)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도 문제겠지만 시민들이 너무 요란스럽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코레일은 이날 오전 출발 예정이던 경원선 백마고지역행 열차 1편과 경의선 도라산역행 열차 1편 등 두 대의 운행을 취소했다.
○ “과도한 불안감은 자제” vs “‘불금’ 분위기 문제”
오후 2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캠퍼스. 아직 방학 중이어서 교정은 비교적 한산했다. 중앙도서관에서 만난 정치외교학과 2학년 곽서연 씨(20·여)는 “북한이 군사 도발을 하는 모습을 자주 봐왔기 때문인지 실제 전쟁이 발생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 중인 이모 씨(21)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예비군의 의무를 다하겠지만 지금으로선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같은 시간 연천군 중면 민방공대피소에는 구호물품이 속속 도착했다.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 주민들은 대한적십자사가 제공한 쌀밥과 닭곰탕, 호박나물 등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쌓이는 구호물품에 주민들은 오히려 현 상황이 장기화될까 봐 불안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주민 박점규 씨(55)는 “늦은 여름휴가를 연천으로 오려 했던 사람들이 취소할까 봐 걱정이다. 안보의식 고취도 좋지만 과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연천군 등에 내려진 주민대피령은 오후 6시에 해제됐다.
서해5도 주민들도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평도 주민 김하성 씨(45)는 “북한이 무차별 공격을 엄포하고 있어 혹시나 국지전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날 백령도 연평도 등 서해5도를 오가는 여객선은 정상 운항했지만 탑승객이 크게 줄어들었다.
사재기 현상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오후 5시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생필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오후 9시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거리에는 평소처럼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식당, 술집, 클럽 등에는 ‘불금’(불타는 금요일의 줄임말)을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히려 우려된다는 반응도 있었다. 택시운전사 박모 씨(56)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불금 잘 보내라”고 하자 화를 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불금’이라는 말을 꺼내는 건 문제가 많다.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다 다리가 잘린 군인을 떠올린다면 차마 못할 얘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 온라인에선 하루 종일 격론 벌어져
길거리의 차분한 분위기와 달리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는 격한 의견이 오갔다. 불경기에 고통받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전쟁을 하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트위터 이용자 @dkak****는 “통일 따위 하지 말고, 총알받이라도 해줄 테니까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인터넷 괴담 유포도 여전했다. 20일에는 대학생 김모 씨(24)가 국방부 명의로 허위 징집 문자메시지를 작성해 ‘카카오톡’에 유포했다가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가족과 남자친구를 군에 보낸 여성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불안감을 쏟아냈다. 부사관 남편을 둔 한 누리꾼은 “밤새 고생하는 신랑 때문에 마음이 아픈데 다른 사람들은 국가안보에 너무 무관심해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이러한 반응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해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차분함의 이면에는 갈등 관계인 북한과 지리적으로 붙어 있는 상황에서 불안이 커지면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도 있다. 의도적으로 전쟁을 떠올리지 않으려는 심리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도발은 있었지만 확대되지는 않았고 정부가 국민을 향해 어떤 행동을 취하라는 메시지를 내놓지도 않았는데 별도 행동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도 “국민들 사이에는 한중 관계나 주한미군의 주둔, 우리 군의 전쟁 억제력 등을 고려한다면 전면전으로 번지지는 않으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며 “전쟁을 하자는 일부 젊은이들의 반응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섭섭함을 극단적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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