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밀어내고 살해하는,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일이 북한에서는 지금까지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인류의 가장 선진적 이상향을 세우겠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시간은 오히려 뒤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을 이미 뛰어넘었다.
○ ‘곁가지’의 ‘원가지’ 숙청사건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 승계를 합법화하기 위해 각종 이론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1970년대 김정일이 만든 ‘백두혈통론’은 ‘장자승계론’과 다르지 않다. 김정일은 ‘곁가지’라는 용어를 만들어 자기 이복형제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외국에 보내 권력의 주변에서 제거했다.
그런데 백두혈통론에 따르면 김정은은 철저히 곁가지이다. 김정남은 첫째 부인의 자식이자 장자이다. 반면 김정은은 셋째 부인의 자식이고 3남이다. 이런 김정은이 13세나 나이 많은 형 김정남을 살해한 것은 곁가지가 원가지를 없애버린 김씨 왕조의 ‘반역’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김일성의 권좌를 물려받기 위해 1960년대 후반부터 권력 싸움에 뛰어든 김정일은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했다. 첫 번째는 삼촌 김영주였고, 두 번째는 계모 김성애와 그의 아들들이었다. 김정일은 생모라는 지원군은 없었지만 장남이란 무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삼촌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권력인 계모와 자식을 밀어낸 뒤 왕좌를 차지했다.
반면 김정은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모친 고용희라는 살아있는 권력을 이용해 권좌에 올랐다. 이후 실세인 고모와 고모부를 제거한 뒤 생모가 없는 장남까지 끝내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북한의 상황에 대입시켜 보면 김성애의 막내아들 김영일이 삼촌 김영주를 제거하고 장남인 김정일을 살해한 셈이 된다. 이렇게 김정은은 아버지가 만든 ‘혈통론’과 ‘후계자론’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유훈정치를 강조하는 북한에서 최고의 반역자가 된 것이다.
○ 해외를 떠도는 김정일의 이복동생들
김정일은 권력 투쟁에 패배한 혈육을 죽이지는 않았다. 물론 1994년까지 김일성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이 사망한 후엔 이미 권력이 공고했고 주변이 정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혈육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김정일의 첫 번째 경쟁자였던 삼촌 김영주는 제풀에 쓰러졌다. 조카와의 권력 경쟁이 불러온 스트레스 때문에 ‘식물성 신경 부조화증’이란 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나중에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김정일은 ‘휴양’을 핑계로 삼촌을 가족과 함께 조선시대 유배지였던 자강도로 보냈고 1993년에야 평양에 불러들였다.
두 번째 경쟁자였던 김성애는 강적이었다. 김일성을 구슬려 “김성애 동지의 지시는 나의 지시입니다”라는 ‘교시’까지 받아냈다. 김성애는 남동생 김성갑, 김성호를 요직에 등용시켜 김정일을 견제했다. 그렇게 김정일보다 12세 어린 김평일이 자랄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김정일은 죽은 듯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김성애와 형제들은 오만해졌다. 김성갑은 김일성이 가장 아끼던 평양의 노른자위 땅에 자기 집을 지었고 여자들을 불러 마약까지 하며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제야 김정일은 반격을 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김성애 비리 자료를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분노한 김일성은 김성애의 모든 권력을 빼앗았다.
김정일의 이복형제인 김평일은 1979년 주유고 북한대사관 부무관으로 쫓겨난 뒤 지금까지 해외를 떠돈다. 그의 남동생 김영일은 해외에서 술로 울분을 다스리다 2000년 독일 베를린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여동생 김경진도 남편이 오스트리아 대사로 발령 나 25년째 평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 로열패밀리로 태어난 죄
김정일의 복수는 소심하면서도 치밀했다. 이복동생 가족들에게 주석궁 옆 2층 대리석 주택을 주었다. 큰 공로를 세운 항일투사들과 똑같은 규모의 집이다. 공급물자 역시 북한에서 최고급으로 보장해주었다. 명절 때마다 자식과 손자들을 주석궁으로 불렀던 김일성을 의식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김성애 역시 주석궁 안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 외롭게 늙어가야 했다. 김성애 일가와 만난 사람들은 즉시 국가보위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김성애 일가의 저택 앞엔 호위국 부대를 주둔시켜 아침저녁으로 김정일 찬양가를 목청껏 합창하게 했다. 호위국 소속 여성 대위가 각 저택에 식모로 파견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김정은의 보복은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다. 아예 살려두지 않는다. 고모부 장성택은 만고의 역적으로 공포된 뒤 비참하게 처형됐고, 고모 김경희는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을 살해한 데에도 김정은이 개입했을 것으로 의심된다. 이뿐 아니라 장성택이 부장으로 있던 노동당 행정부는 과장 이상급까지 모두 처형했고, 나머지는 가족과 함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김정남과 친했던 사람들도 이미 오래전에 숙청됐다. 그들에 대한 작은 기억조차 남겨두지 않고 지워버리겠다는 뜻이다.
만약 김정남에게 권력욕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서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그랬듯이 갖은 수를 써서 부친의 환심을 산 뒤 권력을 차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김정은이 형 정철, 동생 여정과 함께 해외를 떠돌며 분노의 술잔을 들이켜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김정은은 죽음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해 형 김정남을 단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로열패밀리로 태어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자가 감당해야 할 비극적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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