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트럼프, 키신저, 문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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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중국 일부였다”는 트럼프의 황당한 인식
키신저의 강대국주의 외교와 교묘히 맞아떨어져
당장의 성과 집착하는 트럼프에 한국 대통령이 파고들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핵주먹’으로 불린 전 헤비급 세계권투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이 “사람마다 그 나름의 계획이 있지만 주둥아리를 한 방 맞고 나면 계획이고 뭐고 다 사라지는 법(Everyone has a plan til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이라며 자신의 한 방을 자랑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하면서 쓴 책 ‘불구가 된 미국’에서 그대로 갖다 쓴다.

트럼프는 지금 북한 김정은이 한 방 맞고 코피가 터질 것 같으니까 고분고분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북한도 벼랑 끝 협상에는 노하우가 쌓일 만큼 쌓여서 상대가 거친 말부터 할 때는 가능한 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니 그 이상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싸울 의지 없이 거친 말을 앞세우는 구두쇠들은 돈 안 들어가는 협상을 시작하면 자기 계획대로 된 것처럼 좋아한다는 것까지 꿰뚫어 보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은 두 번 속았다. 제네바합의로 북한에 한 번 속았고 6자회담에 헛된 기대를 걸었다, 미국은 이번에도 속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사업가처럼 트럼프도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측면이 있다. 트럼프는 성과를 못 내는 사람을 견디지 못하고 ‘넌 해고야(You are fired)’라고 말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선 더 참지 못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헨리 키신저의 책 ‘외교’는 명저이긴 하지만 ‘강대국주의’적 사고로 약소국의 희망 따위는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대목에서는 냉혈함이 느껴진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평양∼원산 선 이북으로 치고 올라간 것을 실수라고 지적한다. 그것이 단순히 군사전략적 실수라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한반도 북쪽 지역에 대한 중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해야 한다는 고약한 함의가 들어 있다.

트럼프가 역사에 도대체 관심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동아시아 역사에 무지한 건 분명하다. 지난해 트럼프는 워싱턴에서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한반도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더라”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말했다. 그는 과거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朝貢)관계가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의 관계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차이를 ‘도 아니면 모’인 트럼프에게 긴 시간을 설명한다 한들 이해시킬 자신이 없다.

트럼프는 지난달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는 말을 했다.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할 때는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런 사실을 몰랐다가 최근에야 알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휴전상태를 종전상태로 바꾸는 건 돈 한 푼 안 드는, 아니 오히려 들어가는 돈을 아끼는 길인데도 ‘멍청한’ 전임 대통령들이 방치해왔고, 관료들이 쓸데없이 생각을 복잡하게 해 과거의 상태를 답습하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키신저는 ‘외교’에서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소련 붕괴 이후 미국에 유일한 초강대국의 위상이 부여됐는데도 이에 현혹되지 않고 미국이 강대국 중의 하나로 자리잡아야 할, 당시로서는 보이지 않은 미래에 적응해갔다. 이후 9·11테러가 발생하고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전 대통령이 이라크전쟁을 감행하면서 일탈이 있긴 했지만 큰 흐름에서 보면 초강대국으로부터의 후퇴는 계속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었던 ‘전략적 인내’도 그런 후퇴를 보여준다.

키신저 식 외교는 강대국들끼리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통해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18, 19세기 유럽 대륙의 외교에 모델을 두고 있다. 그에게는 이것이 모범적인 현실주의 외교다.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이 공산주의 소련과의 경쟁과정에서 추구했던 가치외교는 냉전 이후 쓸모가 없어졌으며 몇몇 강대국끼리의 협상을 통해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현실주의 외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에 적용될 때 분단을 계속 연장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간혹 키신저를 만나 조언을 듣는다. 키신저의 강대국주의와 트럼프의 ‘돈 안 드는 전략’이 한반도에서 교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 틈을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 하는 문재인 정부가 파고들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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