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다는 편지를 보낸 날.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즉시 알 수가 없었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대사관, 주재원, 파견 근로자 사회엔 소식이 즉각 전달됐다.
해외에 체류 중인 한 북한 사람은 24일 밤 쓰린 가슴 달랠 길이 없었던지 내게 연락해 이렇게 하소연했다.
“정말 충격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너무나 예측 불가능한 대상들이니…. 제 주변에서도 깜짝 놀라 말로는 ‘쪼잔한 놈들’ 이러면서도, 모두 ‘정세가 또 긴장해져 많이 힘들겠구나’ 하며 걱정입니다. 저도 마음이 그냥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북한 사람들은 정말 그냥 이렇게 살라는 운명인가요. 정말 허무합니다.”
북한 사람 대다수가 이런 침통한 심정일 것이다.
최근 행보를 보면 김정은도 자신에게 쏠린 2400만 북한 인민의 기대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김정은이 “미국의 요구를 도저히 받을 수 없어 다시 허리띠를 조여 매자”고 하면 인민은 그를 더 이상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허약한 권위의 마지막 한 꺼풀이 벗겨지는 것이다.
지금 김정은에게 어떠한 양보를 해서도 북-미 수교를 이루라고 압박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북한에서 나온다. 번영의 기회를 차버리는 순간 온순한 인민은 사라진다.
태영호 전 공사는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인플레이션을 잡아 김정은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9년에 진행됐던 화폐개혁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시장에서 상품이 없어졌다. 평양시 당 책임비서 김만길이 주민들 앞에서 사과하고 모든 상업 활동을 재개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민들의 반발에 김정일은 크게 놀랐다. 북한 지도자의 한마디에 벌벌 기던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저항할 줄은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김정일은 한 달 만에 박남기 재정경제부장을 간첩으로 몰아 공개처형하고 주민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부친의 인생 최대 수모와 실패를 후계자 신분으로 곁에서 지켜봤을 김정은은 “생계를 건드리면 무소불위의 독재자 아버지조차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집권 후 시장 통제를 포기했다. 그 결과 북한 시장은 무섭게 커졌고, 그 나름대로 정교하게 분업화됐다.
북한 시장의 표준 격인 통일시장은 의복류, 곡물류, 육류, 화장품류 등으로 품목별 판매 구획이 엄격히 나눠진다. 의복류 구획은 다시 양복, 남자 옷, 여자 옷, 어린이옷 등으로 세분됐다. 상인들은 구획별로 통일된 옷을 입고, 가슴엔 이름과 업종을 소개한 배지를 달고 있다. 한국의 마트 못지않은 체계를 갖춘 것이다. 시장 주변엔 상인에게 돈을 받고 고객을 끌어들여 먹고사는 일명 ‘몰이꾼’이 우글거린다.
북에는 시장이 500개가 넘고 100만 명 이상이 장사에 종사한다. 휴대전화 보급률이 가장 높은 집단이 상인들이다.
시장은 체계적인 공급 시스템도 갖췄다. 가령 평양 사람들은 저렴한 옷을 사려면 서성구역 하당장마당을 찾아간다. 이곳에 ‘가대기’로 불리는 싼 옷을 공급하는 옷 생산자들은 인근 남포시 강서구역에 몰려 있다. 평양에 신발을 공급하는 최대 생산지는 평남 순천이다. 평양에 소비품을 공급하기 위해 지역별로 업종이 특화된 것이다.
시장에서 돈을 번 ‘신흥 돈주’들은 국영상점을 사들이고, 소기업을 만들어 몸집을 키운다. 이렇게 번 돈으로 각종 공사에 ‘충성의 자금’을 내면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는다.
김정은이 통치하는 인민은 바로 이런 ‘장마당 인민’이다. 한번 잘살아 본 이들은 다시 허리띠를 조이려 하지 않는다. 시장이 말라 죽는 순간, 김정은의 권위도 함께 죽는다.
앞에서 언급했던 해외 체류 근로자는 정상회담이 다시 열린다는 소식에 이렇게 전해왔다.
“모두들 깜짝 놀라 좋아합니다. ‘원수님 정말 외교력이 대단하시다’ ‘세계를 잡아 흔든다’고 하는데, 겉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실 대다수가 진심으로 김정은이 위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물을 먹은 이들이 이러하면, 북한 안에 사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김정은에겐 인민의 칭송을 받을 밝은 희망이 열려 있다. 오직 다른 선택의 여지만이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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