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북설이 일본 정가에 퍼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방북 15주년인 9월 17일을 전후해 아베 총리가 전격 방북하여, 북한과 미국을 중재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얘기였다. 한 원로 언론인이 ‘정치생명을 건 모험에 나서라’며 총리에게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일이 잘 풀린다면 아베 총리로서는 바닥권인 내각 지지율을 순식간에 회복하고 핵 납치 미사일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아베 총리는 진심으로 솔깃했던 눈치지만, 정가 주변에서는 그가 실행에 옮기지 못할 거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정치생명을 걸 배포도 없지만, 미국의 승인도 문제였다.
결국 같은 해 9월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아베 총리는 쉽고 익숙한 노선을 택했다. 같은 달 25일 ‘국난(國難) 극복을 위한 해산’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중의원을 해산하는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국난’으로는 물론 ‘북한의 위협’이 강조됐다. 이 북풍몰이는 주효해서 아베 정권은 10·22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는 달랐다. 1년간 후쿠다 야스오 당시 관방장관(후에 총리)과 다나카 히토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물밑에서 대북 교섭을 추진하게 한 뒤 방북 며칠 전 미국에 계획을 알렸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만류가 있었지만 “동맹국이 하는 일을 믿어줘야 한다”며 평양으로 날아갔다. 얼마나 보안에 철저했는지 관방장관과 지근거리에 있던 아베 당시 관방부(副)장관조차 방북 직전까지도 까맣게 몰랐을 정도였다.
기자가 최근 인터뷰한 다나카 전 국장은 평양선언이 좌초한 가장 큰 원인을 미국에서 찾았다. 북-일이 국교 정상화를 진전시키려던 시기, 부시 행정부는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를 동결하는 등 북한에 혹독한 제재를 가했다. 납치 피해자 문제에 대한 국내의 엄혹한 여론도 한몫한 건 물론이다. 그 중심엔 아베 당시 관방부장관이 있었다.
16년 뒤인 지금, 그 아베가 ‘평양선언’을 내세우며 연일 북한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사실 북한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심(變心)으로 가장 난처해진 것은 아베 총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베 정권은 “‘미국의 강아지’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는 쓴소리를 들으면서도 “미국과 일본은 100% 일치한다”며 미국 추수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오랜 ‘아베 1강(强)’ 체제 아래서는 과거 일본 정계에서 존재감을 가졌던 국제협조주의나 근린외교 중시 외교정책도 자취를 감췄다.
이런 상황에 대한 다나카 전 국장의 쓴소리는 신선하게 들렸다. “한반도 평화는 일본에도 엄청난 이익이다. 필요하다면 대가를 치르고 ‘윈윈’한다는 자세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2002년 평양선언은 동아시아 평화라는 큰 그림 속에서 기획됐다.”
자민당 원로로 아시아 중시 외교를 강조해온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장도 최근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일본의 35년 식민지배가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다. 한반도의 큰 상처를 치유하는 움직임을 적극 지원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납치 문제 해결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게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강자만을 추종하는 전략은 잘 풀릴 때는 그보다 쉬운 일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소신과 전략이 없으면 트럼프를 좇던 아베 총리처럼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과연 일본의 대북외교는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북한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량한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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