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칠레로 가는 길에 들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포럼 연설에서 작심발언을 했다. “핵무기가 자위 수단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북한은 안전만 보장되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확신한다.” 북핵 6자회담 출범 1년이 넘도록 아무 진전을 보지 못하던 상황에서 미국인들에게 북한을 대변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에 보좌진이 나서서 만류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더욱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칠레 회담을 앞둔 터라 그 파장을 우려한 한승주 주미대사는 부랴부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만나 이 발언이 정상회담 의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 협의를 해야 했다. 실제로 부시는 이 발언을 거론하지 않았다. 한데 정작 그 얘길 다시 꺼낸 것은 노무현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은 미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대북 강경책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새삼 오래전 일이 생각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달 싱가포르 발언 때문이다. 북한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세 번째 방북 직후 ‘강도적 요구’라고 비난한 데 대해 문재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들은 성의를 다하는데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불평이다. 협상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전략이라고 본다.”
북한을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는 동정론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미) 정상이 직접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북-미 교착상태를 풀기 위한 중재 외교를 다시 가동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실제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잇단 방미로 이어졌다.
그런데 북한이 이 발언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설 줄이야. 노동신문은 “그 누구가 갑자기 재판관이나 된 듯 감히 입을 놀려댄다”며 ‘무례무도한 궤설’ ‘쓸데없는 훈시질’이라고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각종 선전매체들을 총동원해 “미국 눈치나 보는 제재압박 놀음에서 벗어나라”며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군사회담에 나온 북측 대표는 “우리가 미국을 흔들다가 잘 안 되니까 남측을 흔들어 종전선언을 추진할 거라고 (남측 언론이) 보도하더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아냥조로 본심을 드러냈다.
이런 대남 폭언에 비하면 북한은 미국에 대해선 점잖기 그지없다. “미국의 부당한 입장과 태도는 조미관계 개선의 장애가 된다”는 볼멘소리가 전부다. 그러면서 미국 인공위성에 노출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사일 공장 주변에 각종 차량들의 움직임을 대폭 늘렸다. 허공에 대고 무언(無言)의 종주먹질을 하는 셈이다. 한 세기 전 무성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파극 배우 흉내 내기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우리 정부는 영락없이 중매 잘못 섰다가 뺨 맞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미국마저 북한을 편든다고 눈을 흘기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북한의 상투적 수법을 그저 응석으로 받아넘겨온 오랜 관성 탓인지, 우리 정부는 북한의 험구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드러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인 국제관계의 특성상 공개 못할 막후 속사정이나 의외의 반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모든 대외정책이 그렇듯 성패의 절반 이상은 국민 지지에 달려 있다. 말 많고 탈 많은 대북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마냥 저자세로 비쳐선 안 된다. 방자함을 내버려두면 엉뚱한 오판을 낳는다. 이제 따끔하게 한마디 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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