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가진 40, 50대 남성 가장(家長)들의 밥자리 화제 중 하나가 아내와 사춘기 딸의 갈등. 자연스레 ‘어느 집이 더 심한가’ 경연장이 되곤 한다. 한 지인은 “하루는 밤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가는데 ‘아내와 딸이 싸우는 소리’가 현관 밖까지 들렸다. ‘아이고, 또 시작이구나’ 하고 얼른 문을 열었는데 불 끄고 둘 다 자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 하도 시달려 환청(幻聽)이 들린 모양이다”라고 했다.
가정 내 중재도 이렇게 힘든데, 북한과 미국 간 비핵화 협상 중재는 얼마나 어려울까 싶다. 정부는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종잡을 수 없는 북-미 사이에서 환청뿐만 아니라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기자가 만난 전문가들은 “중재 외교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걱정한다.
우선 중재자는 ‘싫은 소리’를 하기 어렵다. 4월 27일 1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께서 우리 때문에 국가안보회의(NSC) 참석하시느라 새벽잠 많이 설쳤다는데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 되셨겠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었던 만큼, 많은 국민의 귀엔 ‘병 주고 약 주는 무례한 발언’으로 들렸다. 중재자만 아니라면 “위원장께서도 밤잠 못 주무시죠?”라고 되받아쳤을 법하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앞으로 발 뻗고 자겠다”고 점잖게 넘겼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등에서 보여준 외교적 무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참아내야 했다. 중재자가 낼 수 있는 큰 소리는 ‘양쪽 다 약속 잘 지켜라’ 정도. “미국과 북한 정상이 직접 한 약속(북-미 공동선언)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문 대통령의 7월 13일 싱가포르 방문 중 발언)
그런데 중재자의 이런 노력과 인내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좋은 소리’도 못 듣는다. 아내와 딸 사이에 낀 아빠처럼 말이다. “아내에게 ‘딸 좀 그만 몰아세워요’라고 하면 아내는 ‘아빠가 그러니까, 애 버릇이 저렇지’라고 내 탓을 한다. 딸에게 ‘엄마한테 작작 대들어라’고 하면 딸은 ‘엄마가 늘 먼저 나를 긁잖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역시 내 탓을 한다. 정말 미치겠다.”(40대 후반 남성 회사원)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중재자의 가장 큰 문제는 ‘당사자 지위가 간과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북-미 협상이 중재는 됐는데, 그 결과가 핵심 당사국인 한국 이익에 반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를 들어 11월 중간선거와 2020년 재선을 겨냥한 ‘외교적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행정부가 미 본토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우선 제거’ 정도로만 일단 타협한다면? 진보 정권 장관급 출신의 한 인사는 기자에게 “한국의 양보할 수 없는 이해를 트럼프 행정부와 김정은 정권에 분명히 각인시켜야 한다. 그것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까지 대비해 비슷한 처지인 일본과의 ‘연합전선’도 미리 다져놔야 한다”고 말했다.
‘금성에서 온 아내’와 ‘화성에서 온 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다가 어느 순간엔 절친처럼 팔짱을 끼고 쇼핑을 하고, 둘만의 외식을 즐긴다. 그 둘을 중재하던 아빠는 ‘날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다행이군’하고 생각하면서도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한 가정의 가장은 속이 쓰려도 소외감도 감내하고, 날아든 ‘신용카드 명세서’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 협상에서 한국은 절대 소외돼선 안 된다. 중재의 대가로 ‘술 석 잔’을 얻어먹기는커녕, 내키지 않는 술값만 내야 하는 상황은 더더욱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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