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수석특사였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72)이 8일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함께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 워싱턴으로 다시 출국하는 장면을 TV로 본 한 정부 관계자가 “엔도르핀이 도는 거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 실장은 1박 2일간의 방북에 이어 김정은의 메시지를 들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북-미 대화를 설득하는 막중한 책무를 맡았다. 청와대 안팎에선 “트럼프와 김정은을 대화 테이블에 앉히느냐의 첫 번째 관문이 정 실장의 혀에 달렸다”는 말이 나온다.
○ 정의용, 맥매스터 집에서 와인 마시며 스킨십
정 실장은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열린 남북 대화 국면에서 일찌감치 대북 특사로 낙점됐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김정은 특사로 방한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만난 직후 대북 특사단 파견을 구상하며 정 실장을 점찍었다는 후문이다. 한 관계자는 “후보로 거론되던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미 정 실장이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정 실장이 대북 특사의 중책을 맡은 것은 방북 결과를 전달하고 미국을 설득할 적임자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 실장은 미국의 안보 컨트롤타워인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알려진 것 이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현안이 있을 때 곧장 전화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이고 워싱턴을 방문할 때는 정 실장이 맥매스터의 집에 들러 와인도 한잔 기울이는 사이라고 한다. 정 실장은 6일 북한에서 돌아온 직후 맥매스터 보좌관과 전화 통화를 갖고 방북 결과를 협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정 실장은 “맥매스터와는 개인적으로 잘 통한다. 사적인 얘기도 많이 나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 북핵 외교 경험 부족 우려 반전시켜
정 실장과 맥매스터는 당초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정부의 안보수장 0순위가 아니었다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17대 의원을 지낸 정 실장은 대선 기간 문 대통령의 외교자문단인 ‘국민아그레망’ 단장을 맡았지만 안보실장에는 서훈 원장이 0순위였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취임 첫날 서 원장을 국정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 실장이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로 낙점됐다. 맥매스터도 지난해 2월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러시아 스캔들’로 낙마한 뒤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안보보좌관 후보군에도 끼지 못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의 추천으로 자리를 꿰찼다.
주로 군 출신이 맡았던 안보실장 자리에 외교관 출신인 정 실장이 임명되면서 처음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워싱턴 근무 경력이 있지만 주제네바대사를 지냈을 만큼 북핵이 아닌 통상이 주특기여서 한미관계를 조율하면서 북핵 해법의 큰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과 관련한 워싱턴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남북 대화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 지지를 받아내면서 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평이다. 한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알려진 것 이상으로 안보 현안에 대해 정 실장의 의견을 경청한다”고 전했다. 외교 현장을 오래전에 떠났지만 워싱턴 핵심 인사들과 오랜 교류를 유지하고 있는 점도 강점이다. 문 대통령의 지난해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좌담회를 개최했던 존 햄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소장은 정 실장에 대해 이름을 부르며 “의용은 내 오랜 친구”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다.
미국에 도착한 정 실장과 서 원장은 트럼프 행정부 고위인사들과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면담을 갖는다. 맥매스터 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과 회동을 가진 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트럼프 행정부 장관 3명과도 만날 예정이다. 8일 오후 또는 9일 오전(현지 시간)에는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 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도 만날 계획이다.
청와대는 북-미 대화 성사 가능성에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의 비핵화 관련 언급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밝힌 합당한 조건(right condition)을 충족하고도 남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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