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한국인 인권 지키고… 한일교류 넓히고… 父傳女傳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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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귀환-위안부 소송 앞장… 지한파 日변호사 다카기씨 방한
공무원 딸은 서울시청서 교환근무

30일 서울시청을 찾은 다카기 겐이치 씨(가운데)가 서울시에 근무 중인 딸 다카기 유키 씨와 함께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미소 짓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30일 서울시청을 찾은 다카기 겐이치 씨(가운데)가 서울시에 근무 중인 딸 다카기 유키 씨와 함께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미소 짓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제 만난 듯 자연스러웠다. 30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일본에서 온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72) 씨가 박원순 시장을 만났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3년 11월로 올라간다. 당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법 근거를 수집하던 변호사 다카기 씨는 전후 보상 관련 심포지엄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자문변호사로 활동하던 박 시장을 만나 함께 활동했다.

다카기 씨는 일본 내 대표적인 지한파이자 인권변호사다. 그가 처음으로 사할린 한인 문제에 눈을 뜬 것은 1973년, 일본 도쿄(東京)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막 합격했을 때였다. 도쿄 아다치(足立) 구에 살고 있는 한 재일교포의 기구한 사연을 우연히 알게 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사할린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일본으로 온 남자였다. 원치 않게 끌려가고 일본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귀국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할린에 버려진 조선인이 4만3000여 명이나 된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1975년 다카기 씨는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을 모아 일본 정부에 사할린 한인의 귀국 책임을 묻는 ‘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소송’을 냈다. 소송은 14년간 64차례의 구두변론이 이어진 끝에 1989년 6월 원고들의 소 취하로 종결됐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일본 정부는 1989년 한일 양국 적십자사를 통해 사할린 1세들의 친척 방문, 영주 귀국을 지원했다. 일본 정부는 항공료와 체류비를 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의 정착을 도왔다. 무관심했던 두 나라 정부의 손을 그가 맞잡게 한 것이다.

당시 소련과 한국은 냉전으로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조선인들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일본을 거쳤다가 절차를 밟은 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꺼번에 수백 명이 들어왔지만 머물 곳이 없었다. 다카기 씨는 기꺼이 집을 내줬다. 50명이 동시에 3주씩 그의 집에 머물렀고 부인은 식사를 대접했다.

이후에도 그는 일본의 전쟁범죄로 인해 고통 받은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1991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소송을 처음으로 냈고, 2007년 9월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할린 한인들의 임금 반환 소송을 시작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그는 한국 국회의원들이 주는 국회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멈춤이 없다. 이번 방한 목적도 국내에 정착한 사할린 한인단체 대표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을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고 표현했다. 어릴 때부터 집에 사할린 한인들이 오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자란 딸 다카기 유키 씨(31)도 ‘한일 가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요코하마(橫濱) 시 공무원인 그는 5월부터 국제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울시청에서 근무 중이다. 이날 다카기 부녀와 함께한 자리에서 박 시장은 “아버지는 한국인 인권을 위해 일했고, 딸은 한일 민간 교류를 넓히는 일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한일 관계가 더욱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다카기 겐이치#박원순 시장#위안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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