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가 새해 벽두부터 일본 중국 미국 등 주변 강대국의 ‘힘의 외교’에 압도당하며 벼랑 끝에 몰렸다. 최근 힘의 외교는 각국의 국내 정치 상황에 기인하고 있으며 한국의 조기 대선을 앞두고 차기 권력의 외교 정책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 과거 외교 파고보다 더 위협적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 정지에 따른 국정 공백 하에서 당국자들의 상황 인식과 대처 방식이 너무 안이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주한 대사의 소환 등 일본의 조치에 대한 맞대응은 자제한다는 쪽으로 기조를 모았다. 외교 당국자는 “한국이 취할 조치는 이미 취한 상태”라며 “맞대응으로 격화시키기보다 상황을 관리해 가며 절제된 모습으로 대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서울과 도쿄(東京)에서 일상적인 외교 소통은 지속적으로 해 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9일 출국하는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 대사가 ‘본국에 한국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밝힌 만큼 조기 복귀 여부와 일본의 태도를 봐 가며 대처한다는 것이다.
부산 소녀상의 처리와 관련해서 외교부는 “외교 공관 보호와 관련된 국제 예양(禮讓·예의를 지킨 공손한 태도) 및 관행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며 “정부와 지자체·시민단체 등 당사자가 역사의 교훈으로 기억하기 적절한 장소에 대해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종래 원칙을 재확인했다.
김관진 대통령국가안보실장(장관급)은 북핵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8일 미국을 방문한 가운데 외교부는 이날 안총기 외교부 제2차관이 9일부터 3일간 미국에 머물며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 및 한미 원자력 고위급위원회 회의에 참석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재빠른 위안부 외교를 펴고 있는 가운데 미국 정부를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시킬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인 대응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대미 외교와 관련해 외교관들은 주한 미국 대사 후임자 인선이 늦어져 공석이 되더라도 한미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외교 소식통은 “마크 리퍼트 대사를 포함해 정치적으로 임명된 특임공관장(political appointee)들은 새 행정부 출범과 함께 자리를 비워 주는 게 미국의 관행”이라며 “대사가 떠나도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미 국무부에서 대사관 차석(DCM·Deputy Chief of Mission)을 비중 있게 운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제1회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고 밝혔지만 한 관계자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인한) 거시동향 자체는 전체적으로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상황 인식을 드러냈다.
하지만 한반도를 흔드는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정치적 속내는 간단치 않다.
아베 총리는 이날 NHK의 ‘일요토론’에 출연해 내년 9월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선 도전을 검토하겠다는 뜻을 시사해 장기 집권 의지를 표명했다. 장기 집권과 평화헌법 개헌으로 가려는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외교 성과물’이 뒤집혀 보수층이 이탈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한국 내 반일 여론을 자극할 것임을 알고도 강행한 소녀상 보복 조치가 일시적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사드 한국 배치에 대해 중국 관영 환추(環球)시보는 7일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한국 화장품 수입 중단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중국의 강공은 올해 지도부가 대거 바뀌는 정치 권력 변동기인 11월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를 앞두고 이미 시작된 중국 핵심 권력 내부의 권력 암투와 관련이 있다. 역시 장기 집권을 노리는 시 주석이 대외 문제에서 약한 리더십을 보일 경우 자신 위주로 권력 지형을 변화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최근 박 대통령 탄핵 파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한국과 관련해 추진하고 싶은 이슈들을 차기 대통령 취임 초부터 밀어붙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 등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추진 카드 등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명확한 국가 목표와 전략을 세우지 못하면 미국과 일본, 중국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당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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