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일본 정부의 ‘일시 귀국’ 조치를 받은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어제 “매우 유감”이라며 한국을 떠났다. 나가미네 대사와 후속 조치를 논의할 예정인 기시다 후미오 외상은 8일 방문 중인 체코에서 “일본은 한일 합의에 따라 10억 엔(약 103억 원)을 출연했으니 한국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전날 아베 신조 총리가 한 말을 반복했다.
일본이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며 “위안부 합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실행돼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대통령 탄핵으로 ‘리더십 공백’을 맞은 한국의 현실을 겨냥한 것이다. 2015년 12월 28일 양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 협상을 어렵게 타결지은 것은 아픈 과거사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타결 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던 아베 총리가 10억 엔 운운하며 ‘국가 신용 문제’를 거론한 것은 사죄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외교적 결례다. 작년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1941년 일본군이 기습했던 하와이 진주만을 찾아 ‘화해의 힘’을 말했던 아베 총리는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그만한 성의를 보인 적이 있는가.
외교 회담 타결 당시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밝혔던 정부는 그후 어떤 노력을 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빈 협약 제22조는 ‘상대국 공관의 안녕과 품위를 지킬 책무’를 규정해 대사관과 총영사관 앞의 소녀상 설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북핵 대처와 중국의 압박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의 공조를 더 강화해도 모자랄 지금, 국가 생존이 걸린 외교 안보 현안에 대해선 전략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책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과도정부라 해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제야 총리실에 적절한 대응 방안 마련을 주문했다니 실망스럽다. 4일 첫 정부 업무보고 대상으로 외교 안보 분야를 택했을 정도면 진작 ‘외교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옳다. 관련 단체를 만나 설득하고 일본에 대해서도 특사 파견 등을 통해 우리 입장을 적극 설명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 축전 같은 ‘앉아서 하는’ 외교 말고 비상 국면에 맞는 비상한 외교 리더십을 보여줄 때다. 주요 대선 주자들이 위안부 합의 재협상을 언급해 국격과 신뢰도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협조를 구하는 일도 해야 한다. 민심은 국정 농단을 탄핵한 것이지 외교 정책까지 파기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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