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 얼마 전 서거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대표적 어록 가운데 하나다. YS의 독불장군 발언은 그가 대통령이자 신한국당 총재를 겸하던 1996년 8월에 나왔다. 당시 김 대통령은 “정당생활이란 단체생활”이라며 “더불어 함께 가고 함께 살아가는 자세를 갖춰야 미래가 있다. 그래야 소망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승자만이 기억된다
정치 9단 YS의 독불장군 발언은 당시 대통령이자 당 총재인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위태롭게 만든 9명의 차기주자군, 이른바 9룡(龍)의 군웅할거를 견제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YS의 발언은 ‘대주주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차기주자가 개인플레이로 대선(대통령선거) 후보가 되기는 힘들뿐더러, 만약 자력으로 대선에 나서더라도 당선하기 힘들다’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YS는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승리하는 당이 돼야 한다. 패자가 기억된다는 것은 오산이며 승자만이 기억된다. 이것이 역사이고 나의 경험이다.”
12월 13일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탈당을 선언했다. 새정연 창당 주역이자 공동대표까지 지냈던 그가 혈혈단신으로 당을 떠나는 모습은 YS의 독불장군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안 의원이 “더불어 함께 가고 함께 살아가는 자세를 갖춰야 미래가 있다. 그래야 소망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는 YS 발언과 정반대 길을 걷게 됐다는 점에서다. 안철수, 그에게는 앞으로 어떤 정치적 미래가 펼쳐질까. 새정연 탈당 뒤 광야에 홀로 선 안 의원은 항성처럼 늘 빛나는 정치인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잠시 밝게 빛났다 쉬 사라지고 마는 유성 같은 정치인이 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안 의원은 탈당 선언 직후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기자간담회를 갖고 야권 핵심 지지기반인 광주를 찾는 등 ‘독자 정치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제1야당과 합작했다 1년 9개월 만에 사업(혁신)에 실패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벤처정치인을 연상케 한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지만, 새롭게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다. 안 의원 스스로도 애플을 창업했다 쫓겨났던 고(故) 스티브 잡스를 언급하며, 자신이 한국 정치의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은연중 암시한다. 그의 바람이 현실화할지는 시간이 입증해줄 터. 그러나 당장 새정연을 탈당한 안 의원에게 유의미한 정치세력이 결집할 개연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안 의원을 따라 새정연이란 둥지를 떠날 현역의원이 많지 않아 보이기 때문.
안 의원이 공동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문병호 의원은 안 의원 탈당 직후 동반 탈당을 공언했다. 하지만 문 의원은 12월 14일을 디데이(D-Day)로 예고했다 15일로 늦췄고, 다시 17일로 미뤘다. 탈당 날짜를 몇 차례 미룬 이유에 대해 문 의원이 나 홀로 탈당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자 동지를 규합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그러나 17일 문 의원이 탈당할 때 동반탈당한 의원은 유성엽, 황주홍 등 일찌감치 탈당이 예상됐던 의원들뿐이었다. 2012년 대선 직전 ‘안철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민주통합당을 탈당하고 안철수 진심캠프에 합류했던 송호창 의원조차 이번에는 당 잔류를 선언했다.
새정연 한 원외위원장은 “총선을 넉 달 앞두고 그것도 공천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역의원이 탈당한다는 것은 스스로 공천을 포기하는 정치적 자살행위”라며 “낙천이 확실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탈당을 선택할 현역의원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의원 탈당 이후 만난 새정연 소속 수도권 한 초선의원도 “문재인 대표 체제로는 총선 승리가 어렵다는 점은 의원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그렇다고 안 의원처럼 당을 뛰쳐나가는 것이 총선 승리를 높이는 방법도 아닌 것 같다”며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고 복잡한 속내를 밝혔다.
주목되는 선출직 평가 결과
안 의원의 새정연 탈당이 정치권 전체는 물론, 야권에서조차 거센 후폭풍을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일차적으로는 새정연 의원과 야권의 총선 입지자들에게 안 의원이 ‘나와 함께라면 총선에서 당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종 대선 관련 여론조사에서 안 의원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은 10% 내외. 그에 비해 새정연 정당 지지율은 20%를 상회한다. 정당 지지율과 차기주자 지지율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안 의원 지지율이 새정연 지지율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상황에서 제1야당 후보로 기호 2번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지율 10%에 머문 안 의원에게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맡기는 것은 도박과 같을 수 있다.
총선 승패를 가르는 3요소는 구도, 인물, 바람이다. 구도는 여야 일대일 맞대결 구도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유불리가 크게 갈린다. 안 의원 탈당으로 2016년 총선 구도는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로 재편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근소한 표차로 당락이 갈리는 수도권 선거에서 야권 후보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당에 남아 있어도, 그렇다고 탈당한 뒤 안 의원과 함께해도 불리한 것은 매한가지다. 뛰어난 인물 경쟁력을 가졌다면 불리한 구도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그런 후보는 많지 않다. 수도권 출신 새정연 현역의원들이 섣불리 탈당을 감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지막 변수는 안 의원의 탈당이 총선에 어떤 바람을 불러일으키느냐다. 바람 세기에 따라 태풍이 될 수도 있고, 미풍에 그칠 수도 있다. 만약 2011년과 같은 안철수 현상이 재현된다면 새정연 잔류보다 탈당한 안 의원과 함께하는 것이 총선에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안 의원의 탈당은 2011년 서울시장 후보직 양보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국민이 안 의원의 탈당을 거세게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안 의원이 총선 때까지 외롭게 나 홀로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 가지 변수가 남았기 때문이다. 새정연에서 선출직 평가 결과가 나오는 시점이 안철수 정치세력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새정연 한 중진의원의 측근은 “안철수 의원이 당을 떠났다고 곧바로 합류할 의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컷오프 결과가 나오면 낙천이 확실한 의원들이 살길을 찾아 당을 떠날 공산이 크다”며 “그때 당 밖에 나가 있는 안 의원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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