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서북부는 지금도 아파트 무덤, 강행하면 내년 총선 때 두고 보자”

  • 주간동아
  • 입력 2019년 6월 1일 14시 19분



경기 일산신도시와 파주 운정신도시, 고양 창릉신도시가 상생하려면 자족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고양 창릉동 일대 모습. [뉴시스]
경기 일산신도시와 파주 운정신도시, 고양 창릉신도시가 상생하려면 자족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고양 창릉동 일대 모습. [뉴시스]
#1 30대 회사원 A씨 1993년 부모를 따라 경기 일산동구의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전까지 살던 서울 마포구 아파트보다 넓고 깨끗해 마냥 좋았다. 새로 지은 중학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전학이 두려웠지만 자기처럼 전학 온 친구가 많아 잘 어울렸다. 주말이면 호수공원에서 친구들과 만나 놀았고, 음식점이 즐비한 복합 상가에서 가족과 외식했다. 성인이 돼서도 일산을 떠나고 싶지 않아 결혼 후 부모 집 근처에 집을 얻었다. 그런데 3기 신도시 발표 이후 동창들 카카오톡방에 누군가 ‘일산에 계속 사는 우리는 망했다’고 말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집도 대학처럼 ‘인서울’ 했어야 했다.

#2 40대 자영업자 B씨 쉰 살이 다 되도록 한 번도 내 집을 갖지 못했던 부모가 청약에 당첨돼 25년 전 일산에 정착했다. 1기 신도시 가운데 일산을 선택한 건 부모 친구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은퇴가 머지않았던 부모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 여가를 즐기면서 노후 대책 정보도 공유했다. 그때만 해도 일산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지금이라도 일산을 떠나라”고 말한다. 파주 운정신도시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교통대책에 희망을 걸었는데 이행된 것이 없을뿐더러 3기 신도시 폭탄까지 터져 다들 좌절감이 크다.

1990년대 초 개발된 일산신도시 모습. [동아DB]
1990년대 초 개발된 일산신도시 모습. [동아DB]
#3 70대 일반인 C씨 지금은 시집간 딸이 10년 전 일산신도시에 직장을 얻었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자택에서 출퇴근하는 데만 3시간이 걸리는 걸 보고 일산에 오피스텔을 얻어줬다. 딸이 출가한 후에는 노후자금 마련을 위해 처분하지 않고 월세를 놓았다. 은행 이자보다 수익률이 높았고, 월세 수입도 가계에 보탬이 돼 계속 보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3기 신도시 발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고양 창릉에 신도시가 들어서면 월세가 안 들어올 게 뻔하니 손해 보더라도 오피스텔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5월 7일 국토교통부(국토부)가 3기 신도시 공급방안을 최종 발표했다. 앞서 지난해 12월 남양주 왕숙, 하남 교산, 인천 계양지구를 지정한 데 이어 이번에는 고양 창릉, 부천 대장지구를 추가로 지정했다. 지난해 9월 13일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 수도권에 30만 호 공급계획을 발표한 데 따른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5월 23일 세종시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인천지하철 2호선 연장 등 3기 신도시 후속 교통대책을 발표했다. [뉴시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5월 23일 세종시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인천지하철 2호선 연장 등 3기 신도시 후속 교통대책을 발표했다. [뉴시스]
과열된 부동산시장을 잡겠다는 목표는 달성했으나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신규 택지를 지정하려다 보니 후폭풍이 거센 상황이다. 특히 경기서북부가 들끓고 있다. 1989년 1기 신도시로 지정된 고양 일산신도시와 2003년 2기 신도시로 지정된 파주 운정신도시 주민들이 즉각 거리로 나섰다. ‘3기 신도시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집회는 5월 12일 파주시 와석순환로 사거리, 18일 고양시 주엽공원, 25일 고양 일산동구청 앞으로 이어졌다. 1000여 명이 모인 1차 때와 달리 2·3차 집회에는 1만여 명이 운집했을 정도로 주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집회를 주최한 일산신도시연합회(일산연) 측은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임동수 일산연 대변인은 “정책에도 순서가 있다. 경기서북부는 지금도 미분양, 미입주 사태가 벌어져 아파트의 무덤이 되고 있다. 정부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없고, 3기 신도시 카드만 꺼내 들었다. 그동안 일산은 선거 때마다 정치인의 무수한 공약이 쏟아진 곳이다. 하지만 모두 공수표로 돌아간 데다 3기 신도시 폭탄까지 터져 원주민들의 박탈감이 큰 상태”라고 전했다.

인천지하철 2호선? 서울행 체증부터 해결해야

정부는 경기서북부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5월 23일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인천지하철 2호선 12km 연장, 서울지하철 3호선 연장, 대곡~소사 복선전철 연장 등 교통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별것 아니다”라는 반감만 돌아왔을 뿐이다. 임 대변인은 “파주·일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서울지하철 3호선과 자유로밖에 없다. 파주·일산 주민 150만 명이 30년 전 마련된 교통수단을 지금까지 이용하는 셈이다. 인천지하철 2호선 연장은 이곳의 서울 출퇴근족에게 의미가 없고, 서울지하철 3호선 연장도 더 복잡해질 뿐이다.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가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며, 이 밖에 자유로와 강변북로 지하화 사업 등 더 혁신적인 교통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성토했다.

새로운 교통대책에 대해 반감이 큰 이유는 실행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일례로 서울지하철 3호선 연장안은 2016년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된 바 있지만 실행이 지지부진했다. 지난해 11월 파주시에서 국토부에 예비타당성(예타) 조사 면제를 건의했으나 이행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3호선 연장안은 경제성을 따지는 예타만 넘기면 조속히 실행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천지하철 2호선 연장과 대곡~소사 복선전철 연장 방안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렇다면 고양 창릉지구 신설과 함께 발표된 교통대책은 어떨까. 앞서 국토부는 고양 창릉지구 공급과 함께 △서울지하철 6호선 새절역부터 고양시청까지 지하철 신설(14.5km) △일산 백석동부터 서울문산고속도로까지 연결하는 자동차전용도로 신설 통해 자유로 이용 차량 분산 △창릉지구와 제2자유로 연결 △화랑로 확장 및 교차로 2곳 지하화 △수색로 입체화와 △월드컵로 입체화로 정체 구간 개선 △통일로~중앙로 BRT(간선급행버스체계) 신설하고 시청·신촌까지 전용차로 연계 등 교통대책 7가지를 발표했다. 이 대책은 대체로 창릉지구에서 서울로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파주 운정이나 일산 주민들이 보면 서울로의 유입량이 더해져 교통체증이 더 심해질 뿐이다.

특히 일산서구가 지역구인 김현미 국토부 장관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크다. 일산동구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최모 씨는 “원래 일산은 전통적으로 더불어민주당(민주당) 텃밭이었다. 국회의원, 시장, 시의원 할 것 없이 민주당이 우위를 점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김현미 장관 욕을 안 하는 사람이 없다. 막말로 장관 되고 나서 주택담보대출 규제 이외에 신속하게 진행한 게 없다. 교통대책을 발표한 것으로 무마할 의도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5월 28일 자유한국당은 일산 킨텍스에서 긴급현장 토론회를 열고 정부의 무분별한 신도시 지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나경원 원내대표는 “정부가 서울 집값 잡겠다고 나섰다 신도시 집값만 잡게 생겼다. 1·2기 신도시를 죽이면서까지

3기 신도시를 추진하는 것이 과연 (국가적으로) 도움이 되겠는가.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산은 야당인 자유한국당에 대해 썩 우호적이지는 않지만 이념이나 정파를 떠나 일산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것에 반색하는 이가 적잖다. 일산연 온라인 카페에는 ‘정치중립’을 표방하지만 일부 회원은 이에 호응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번 사태 파악을 잘한 듯’ ‘3기 신도시 철회를 위해 시민과 한목소리 내주는 정치인이면 정당은 상관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나경원이면 어떻고 홍준표면 어떠냐’ 같은 의견이 올라왔다. 또한 일각에서는 ‘내년 4월 총선에서 일산 민심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3기 신도시는 1990년대식 주택공급 방안

5월 18일 경기 일산서구 주엽공원에서 2차 ‘3기 신도시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날 열린 집회에는 일산, 운정, 검단 등 1???·??2차 신도시의 주민 1만여 명이 참석했다. [뉴스1]
5월 18일 경기 일산서구 주엽공원에서 2차 ‘3기 신도시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날 열린 집회에는 일산, 운정, 검단 등 1???·??2차 신도시의 주민 1만여 명이 참석했다. [뉴스1]
저출산시대 인구 감소가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신도시를 추가 공급하는 것이 과연 실효성이 있느냐 하는 의문도 따른다. 1989년 4월 1기 신도시가 지정되고 1992년 말 최초 입주까지 걸린 시간은 2년 9개월에 불과하다. 당시 경기도에는 그린벨트를 해제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택지로 쓸 땅이 많았다. 이 때문에 단시일 내 입주가 가능했고, 예정됐던 물량도 대략 5년 만에 90% 넘게 공급됐다.

하지만 2기 신도시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2003년 참여정부는 경기 김포, 인천 검단, 화성 동탄1·2, 평택 고덕, 수원 광교, 성남 판교, 서울 송파 위례, 양주 옥정, 파주 운정 등 수도권 10개 지역에 신도시 건설을 발표했다. 발표된 이후 최초 입주까지 짧게는 3년가량 걸렸으나 길게는 올해 입주가 이뤄진 곳도 많다. 심지어 아직도 짓고 있거나 분양을 앞둔 단지도 있다.

또한 2기 신도시가 공급되는 와중에도 최근 2년간 서울 집값은 급등했다. 이 때문에 3기 신도시 공급이 능사는 아니라는 의견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3기 신도시가 결국 주변 지역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한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 원장은 “3기 신도시 공급은 결과적으로 1·2기 신도시 주민을 빨아들이는 빨대효과만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 강동구에 입주 물량이 쏟아져도 강남구, 서초구 대기 수요가 옮겨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양 창릉에 신도시가 생긴다고 해서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 등 서울 주요 도심 대기 수요가 이주할 개연성은 낮다”고 말했다. 이에 서울 집값을 장기적으로 안정화하려면 1990년대식 베드타운 공급이 아닌, 새로운 해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만약 3기 신도시를 짓는다 해도 인근 신도시 주민과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한다. 2기 신도시 가운데 성공 사례로 꼽히는 판교와 같이 자족기능을 강화해 1·2기 신도시 인력까지 흡수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답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일산연 측은 고양 창릉지구에 아파트만 지을 것이 아니라 일산테크노밸리로 예정됐던 곳에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업을 유치해 고용 창출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앞서 국토부는 5월 7일 발표에서 3기 신도시가 ‘일자리를 만드는 도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택용지의 3분의 2 이상을 자족용지로 확보해 기존 신도시 대비 2배 수준으로 자족기능을 강화할 예정이며,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 기업지원 허브와 창업지원주택 공급 청사진도 제시했다.

일산테크노밸리, K-컬처밸리 등 자족기능 강화해야

하지만 고 원장은 “정부가 자족 부지를 마련해도 실물경기가 둔화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선뜻 이주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SK 같은 대기업이 용인으로 이주를 결정했듯이 대기업이 경기서북부로도 옮겨 갈 수 있도록 규제 완화, 세제 혜택 등을 줘야 한다. 일산은 20년 넘은 도시로 기반시설이 매우 훌륭하다. 분당과 판교가 상생하는 것처럼 일산과 고양 창릉이 상생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기존에 나왔던 공약의 이행 여부도 관건이다. 2016년 당시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첨단 정보기술 산업단지인 일산테크노밸리를 일산서구 대화동 일대에 2020년까지 조성하기로 했다. 1900여 개 기업 유치, 1만8000여 명 직접 고용 창출 등의 내용이 일산 시민들에게 희망을 줬지만 올해 2월에야 고양시의회에서 ‘일산테크노밸리’ 특별회계 조례안이 가결됐다. 이와 관련해 이재준 고양시장은 “조속한 추진으로 조기에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며 속도을 내고자 했으나 현재까지 진행이 더딘 상황이다.

또 일산 킨텍스 일대에 들어설 예정이던 한류월드 역시 7~8년째 추진되고 있지만 완성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16년 한류월드 테마파크 개발 사업 민간사업자 공모에 CJ ENM이 단독으로 나서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음에도 계획안이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등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2018년에는 K-컬처밸리로 이름을 바꿔 착공 예정이었으나 부지 내 수변공원인 한류천이 문제가 돼 착공이 연기된 상태다. CJ ENM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그룹 차원에서 개발 의지가 큰 만큼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 테마파크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입장을 밝혔다.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91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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