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9월호/특별기획Ⅰ ‘롯데 사태’ 그후]
‘미워도 롯데’를 위한 변명
● 롯데 ‘국적 찾기’ 하다가 ‘국적 씌우기’ 될라
● 후계자 결정은 이해관계 반영한 이사회 몫
● 신 총괄회장 물러날 준비 못한 건 잘못
● 롯데 같은 기업 10개 더 유치한다면…
롯데 사태’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샤롯데와 베르테르의 사랑과 연민에 관한 이야기와는 정반대인 막장 드라마로 흘렀다. 총수 후계를 둘러싼 형제 간 골육상쟁이 ‘롯데 드라마’의 줄거리로 부각됐다.
그러나 리얼 스토리를 보는 관전 포인트는, 자살로 끝나는 소설 결말을 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식이 돼선 곤란하다. 80조 원의 매출, 10만 명의 임직원, 한국 재계 5위 기업의 이해와 생사가 달린 문제인 만큼 단순한 호기심, 의혹 제기 식의 조롱, 맹목적 민족주의 같은 감정적 대응이나 호사가, 정치인의 ‘씹을 거리’로 치부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에겐 소설보다 더 나은 결말이 필요하고, 롯데는 이번 사태 이후에도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 따라서 롯데의 실제 드라마를 정신 바짝 차리고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더 높은 경쟁력을 갖춘 롯데의 미래가 가능한지 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롯데 사태에 대한 감정적 대응의 첫 번째 사례는 지배구조와 맞물린 기업의 국적 문제에 대한 논란이다. 글로벌 경제가 활성화한 상황에서 기업 국적을 따지는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통상 4가지 기준이 있는데, 법인 등록지, 주요 사업지역, 관리 주체의 국적, 대주주의 국적 등이다. 단순히 총수와 기업 경영진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로 국적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비논리적인 처사다.
무의미한 국적 시비
그런데 기업의 국적이 이슈가 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예를 들면 최근 법인세를 높인 미국은 그 부담을 지우기 위해 기업 국적을 따지고 있으며, 국경을 넘어선 합병(cross-border merger)에서 자국 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국가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산업 부문에서 해외 기업의 진입을 저지하려 할 때 국적을 따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최근 정치권에서 논의 중인, 롯데의 국적 정리를 위한 조처들이 어떤 경영적 혹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뚜렷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민연금 등이 롯데 계열 상장사에 대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라는 주문을 내놓기도 하지만, 이것도 문제의 본질을 잘못 본 것이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것이 ‘근대적인’ 기업의 거버넌스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대주주로서 소유 자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경영에까지 간섭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과 같다.
‘정치권의 말을 잘 듣는 대기업을 만들자’는 게 목표라면 더 큰 문제다. 다양한 이해단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부담은 글로벌 기업보다 국내 대기업이 크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같은 시장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이 같은 역차별 현상이 존재하는 마당에 ‘국적 찾기’는 자칫 ‘국적 씌우기’가 될 수도 있다.
한국 기업이라는 자격을 취득할 때 국내시장은 물론 세계시장 진출에 더 유리하다고 여긴다면 한국 국적은 선망의 대상일지언정 회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특히 많은 국가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는데도 한국을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글로벌 기업이 생겨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국적 찾기의 올바른 목적을 생각해볼 시점이다.
더 나아가, 기업의 국적 무용론이 대두되는 마당에 국적 자체가 ‘깜’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유럽연합(EU)이 구성되면서 유럽의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고 EU 법에 따른 ‘유럽 회사(European Company)‘가 설립되고 있다. 유럽 회사는 유럽에서 사업을 하기에 더욱 단순하고 효율적인 회사로, EU 전체 시장을 두고 필요한 자원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 있는 회사다. 아울러 웹에서만 활동하는 가상기업(virtual corporation)이 존재하고, 해외 생산이 보편화하는 마당에 글로벌 경영에서 국적을 따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묻는 사람도 많다.
롯데가 일본 기업이 된다면
설사 대주주가 외국인이라 한들, 이들의 자본이 국내에 투자돼 공장과 건물을 짓고, 사람을 고용하고, 세금을 꼬박꼬박 낸다면 그 해외 자본이 국내 경제에 해악을 끼친다고 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해외 자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국부 유출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데, 그렇다면 해외에 투자해 경쟁력을 갖추고 많은 수익을 내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외국 처지에선 국부를 유출하는 기업일까.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GM은 우리의 국부 유출에 앞장서는 기업일까.
롯데는 그동안 국내 재벌 기업의 행태를 그대로 ‘모방’해 주주들에 대한 배당금을 늘리기보다는 몸집 불리기에 몰입한 나머지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더 많은 산업에 뛰어들고, 더 많은 생산을 해왔는데 과연 국부 유출에 골몰한 기업이라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라는 압력이 기업들의 국적 문제를 더욱 부각해 현지 법인의 독립성이 약화되고, 오히려 자국 기업으로 봐도 무방하던 기업이 해외 기업의 완전한 자회사로 전락하는 사례다. 가령 셸(Shell) 그룹은 1907년부터 영국 자본과 네덜란드 자본에 의해 공동 소유·운영돼왔는데, 다양한 사회적 압박으로 2005년 국적을 분명하게 해 영국계 기업으로 구조 개편됐고, 네덜란드는 중요한 자국 기업 하나를 잃게 됐다.
국적을 따져 불이익을 준다면, 해외 모기업은 해당 국가에 제한된 기능만 수행하는 조직을 남겨둔 채 한발쯤 빼는 어정쩡한 형태로 사업을 운영한다. 문제는 연구·개발(R·D)이나 지역총괄본부 같은 핵심적인 부서의 질 좋은 일자리는 국적을 따지는 국가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적을 분명히 하라는 요구에 롯데가 지분 정리에 나서 난데없이 일본 기업이 된다면, 과거 10년과 같은 적극적인 국내 투자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업의 국적 문제는 정치적 중요성을 감안한 것일지는 몰라도 경제적 중요성을 감안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중요성도 국내용으로 끝나버리고, 정작 중요한 국제정치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간과될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점차 긴밀해지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심화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자본의 공유도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를 돕는 것이 해당 국가에 진출한 자국 기업을 돕는 일이기도 하기에 서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툭하면 전쟁을 불사하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최근 오랫동안 평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두 국가에 다국적기업 투자가 늘면서 관련 국가들이 상호 파괴적인 전쟁을 적극 만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 탓에 한국과 일본 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롯데의 국적 찾기는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에 희소식이 될 수 있을까.
국적 찾기가 자칫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기업의 퇴출을 촉진한다면 한국은 세계시장에서 고립되고, 이는 경제적 고립을 넘어 정치적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의 외환위기를 도왔던 일본은 더 이상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 한반도의 전쟁을 만류하는 국가도 찾기 어렵게 될 수 있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50% 이상을 무역에 의존한다. 한국이 시작한 ‘국적 따지기’에 동참하는 국가가 늘어나면 어느 나라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까.
롯데의 지배구조에 따라 일본 대주주의 통제가 가능해져 한국 소비자와 국민의 이익에 반한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이는 현지 법인의 독립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모기업 관여 없이 현지 법인이 얼마나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인데, 이는 지배구조와 관계 없이 기업 운영의 효율성과 관련된 문제다. 후계 잡음 없는 게 더 문제
상당수 글로벌 기업은 현지 법인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게 한다. 킴벌리클라크, 홈플러스, 맥도날드, 르노 등은 한국 현지 법인에 상당한 권한을 줬고, 심지어 일본 세븐일레븐(7eleven)이 모기업인 미국 세븐일레븐을 인수하고, 한국 휠라(FILA) 같은 현지 법인이 모기업을 인수한 사례도 있다.
한국에도 이런 사례가 많다. 동방CJ홈쇼핑, 타이틀리스트 등도 한국 기업이지만 주요 시장의 해외 현지 법인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현지 법인의 독립성은 시장 특성의 차이, 사업 규모, 경쟁, 경영 환경과 소비자의 변화 속도,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 필요성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일본 롯데와 한국 롯데는 사실상 전혀 별개의 사업 분야에 진출해 있으며, 시장 환경도 상당히 다르다. 지배구조는 두 국가의 기업을 보유하는 형태가 될 수 있지만, 실질적인 통제는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더욱 효율적일 것이다. 한국 소비자와 국민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의사 결정이 롯데를 키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에서 형제 간, 부자 간 갈등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인기 주제이지만, 작금의 롯데 경영권 다툼을 흥미 위주로만 보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우수한 최고경영자(CEO)를 뽑기 위한 불가피한 갈등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이나 일본의 장수 기업치고 후계자 선정을 대충대충 하는 경우는 없다. 다수의 후계자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과거 성과와 미래 비전을 지켜보며 오랜 시간을 두고 최종 선발한다.
오히려 아무런 잡음도 없이, 경영성과와는 무관하게 은퇴하는 자신에게 잘해줄 CEO를 선발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큰 문제다. 후계자를 발굴하고 키우고 물려주는 것은 CEO의 역할이요 책임이지만, 최종 결정은 이사회의 몫이다. 이사회가 그것을 결정하는 이유는 창업자 등 소수의 사람을 위한 선정이 아닌,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안녕과 복지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롯데가 반성할 것들
그렇다고 해서 향후 한국 경제의 주춧돌로 계속 남아야 할 롯데가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우선 일이 이렇게 불거지기까지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후계자 선정에 관한 계획을 갖고 있는 듯하다. 비록 작은 풀(pool)이지만 적당한 후계자를 발굴할 수 있는 다수의 대상자를 염두에 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잠재적 후계자가 성장하고 경험을 쌓도록 기회를 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전에 자신은 언제 물러날 것이며 물러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지 못한 사실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대표적인 가족경영 기업인 일본 도요타자동차, 미국 포드자동차, 독일 보슈 등은 100년 역사의 기업이다. 그 과정에서 전문경영인이 CEO가 되기도 하고, 가족 중에 적임자가 있으면 그 직책을 맡기도 했다. 이들 국가의 기업에 비해 역사가 짧은 한국 기업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가족보다 기업이 우선시되는 풍토에서 실력 있는 자가 CEO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가야 한다.
롯데는 롯데월드타워 건설, 해외 진출 등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롯데의 핵심 역량은 사업 기회를 일찌감치 알아보는 안목이라 할 수 있으며, 비록 ‘최초’나 ‘최대’는 아니지만 재빠른 모방전략으로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일단 사업 진입을 결정하면 군대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선두주자를 따라잡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일본과 한국을 넘나드는 경영을 통해 두 나라의 문화적 장점도 잘 이해하고, 이를 활용해 제3국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키운 듯하다.
그렇다면 지금 왜 롯데 문제가 부각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과거에서 해답을 찾기보다는 미래의 발전과 연관지어 생각해봐야 한다. 한마디로, 과거와 같은 경영방식으로는 향후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거대 기업에 대한 우리 국민의 기대 수준이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기에 롯데는 작은 의미에서의 기업가치 범위를 넘어 사회가치 향상에 힘을 쏟아야 한다. 소비자는 말할 것도 없고 공급업자, 근로자들과의 동반의식이 부족해 보이면 가차 없이 화살이 날아든다.
또한 글로벌 차원의 경쟁에 대비하기 위해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 돼야 하며, 이는 개인기업 형태의 폐쇄적인 경영에서 벗어나 더 많은 계열사가 상장되는 개방형 경영을 추구하게 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장경제에서 거의 유일한 정의로움은 위험 감수에 비례한 보상, 즉 이익 배당이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롯데의 성장에 기여하는 국내 주주, 소비자, 임직원 등에 대한 보상이 단지 지배구조상 우위에 있는 일본 주주보다 적어서는 곤란하다. 10개의 롯데
롯데 사태가 한국 경제 발전의 계기가 되려면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개발연대의 발상으로 특혜를 줘서 재벌을 키웠으니 이제 그걸 갚으라는 요구는 부질없다. 궁극적으로 공정한 경쟁의 틀에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국적을 떠나 롯데 같은 기업을 10개 더 유치할 수 있다면 저성장 문제나 청년실업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롯데마트는 이제까지 유일하게 성공한 한국 유통기업의 대규모 해외 진출 사례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롯데마트엔 한국 아이돌이 등장하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고, 익숙한 한국 히트곡이 들려온다. 매장 한 부분에는 한국 제품 특별 전시관이 있다. 현지 대형마트보다 더 많은 한국 제품이 진열돼 있는 걸 보면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낀다. 국적은 잘 모르겠지만 그곳 점장이나 핵심 관리자는 한국말을 훌륭하게 구사한다. ‘별에서 온 그대’가 아니라면 그들은 분명 한국인일 것이다. 안승호 숭실대 경영대학원장, 한국유통학회장 shahn@ssu.ac.kr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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