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 시간) 칠레에서 호주 브루나이 캐나다 칠레 일본 말레이시아 멕시코 뉴질랜드 페루 싱가포르 베트남 등 11개국(영문 알파벳순)이 모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공식 서명한다. 지난해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탈퇴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폐기가 유력했던 TPP는 일본 등의 끈질긴 노력으로 부활했고, 중국 견제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까지 복귀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이 됐다. 자칫 한국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 트럼프가 팽개친 TPP, 아베가 기사회생시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16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트럼프 당시 당선자를 만났을 때 TPP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맞서기 위해 미일이 손잡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을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선거 기간에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재앙 같은 협정”이라며 TPP를 비판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듬해 1월 취임과 동시에 TPP에서 탈퇴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TPP 같은) 다자협상 대신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양자무역협상에 주력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미국은 TPP 가입국(미국 포함 12개국 기준)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미국 없는 TPP는 유명무실하며 조만간 폐기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미국 없이는 참가국 전체 GDP의 85% 이상 비준이라는 발효 요건도 불가능했다. KOTRA는 당시 “TPP 무산은 기정사실”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싱가포르는 중국이 주도하는 RCEP 협상에 주력하겠다고 했고, 캐나다 말레이시아 등은 양자협상으로 돌아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일본을 필두로 호주 뉴질랜드 등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을 빼고라도 진행하자’며 의기투합했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를 선언한 날 맬컴 턴불 호주 총리와 전화하며 “TPP를 살리자”고 다짐했다. 자유무역협정(FTA) 후진국이었던 일본은 쌀 시장 개방 결단까지 내리고 국회 비준까지 마친 다음이어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아베 총리에게 TPP는 인구 감소로 인한 시장 축소를 만회할 아베노믹스의 핵심이었다. 중국 주도의 역내 경제 질서에 대항할 ‘비장의 카드’이기도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낙농업 분야 시장 확대를 위해 TPP에 적극적이었다.
결국 미국을 제외한 11개국은 지난해 5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모여 ‘2017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까지 협상을 마무리 짓자’고 합의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TPP 부활에는 남은 11개국 GDP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일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아베 총리는 관계국 정상들과 릴레이 회담을 갖고 동분서주하며 불씨를 살렸고, 고비 때마다 직접 정상들과 통화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막판에 캐나다가 외국 영화 규제 강화를 주장하며 협정 수정을 요구했을 때 아베 총리는 나머지 국가들과 긴밀하게 조율하며 대(對)캐나다 포위망을 결성해 양보를 이끌어 냈다.
○ 미국 돌아올 길 열어둔 TPP, 8일 칠레서 서명
지난해 11월 베트남 다낭에 모인 TPP 11개국의 통상장관들은 1000개 이상의 전체 항목 중에서 미국과 관련된 항목을 동결(시행 보류)하기로 하고 큰 틀에서 합의했다. 의약품 개발 데이터 보호기간 등 미국이 강하게 주장해 온 22개 항목을 동결했고, 미국이 복귀하면 그 해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기존 TPP 협정의 내용을 최대한 유지했고 대신 명칭만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변경했다.
CPTPP는 8일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공식 서명된다. 이후 각국의 비준 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과반수인 6개국이 비준하면 발효된다. 참가국들은 내년 발효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협정이 발효되면 일본은 모든 무역 품목의 95%, 나머지 10개국은 99% 이상 관세가 철폐된다. 또 세계 GDP의 13%, 교역량의 15%를 차지하는 거대 경제권이 탄생한다. 당초 미국이 포함됐을 때 세계 GDP의 38%, 교역량의 26%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던 것과 비교하면 규모는 줄었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자유무역의 불씨를 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는 평가다. 일본은 지난해 유럽연합(EU)과 경제동반자협정(EPA)에 이어 메가 FTA를 성사시키며 자유무역의 가치를 지키는 선봉에 선 모양새가 됐다.
미국은 최근 TPP에 복귀할 수 있다는 신호를 연이어 보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더 나은 협상으로 조건이 좋아진다면 TPP를 다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턴불 호주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도 지난달 27일 “재가입과 관련한 고위급 대화가 시작됐다”고 했다.
○ 역내 공급망 구축, 한국 기업에는 불리
일본 등 참가국들은 언제든 미국이 복귀하면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협정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무역 질서를 주도한다는 목적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협상’을 조건으로 내거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 기류가 강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특유의 강경한 태도로 나머지 참가국에 대폭 양보를 강요할 경우 간신히 지킨 TPP의 틀 자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올 1월 국회에서 미국의 복귀를 환영하면서도 “합의는 유리 세공같이 (정교하게) 이뤄졌다. 재협상은 매우 어렵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TPP 참가국 사이에선 미국이 올 11월 중간선거 이후 본격적으로 TPP 복귀 수순에 돌입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국이 TPP에 참여하면 일본 기업이 말레이시아산(産) 부품으로 베트남에서 제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할 때도 특혜 관세를 적용받을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TPP 회원국 사이에서 역내 공급망이 구축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한국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 FTA 재협상을 언급하며 한국에 대해 무역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데 그 결과에 따라 한국 측의 피해는 더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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