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일거에 허물어뜨린 ‘혁신가’ 밥 딜런(75)은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2010년 3월 3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펼친 것. 당시 공연을 주관했던 액세스ENT 관계자는 “해외 스타가 올 경우 공연 대기실에 비치하는 준비물 목록이 수십 종에 이르고 각종 명품의 이름이 열거되는 게 보통인데, 밥 딜런의 요구는 딱 네 가지뿐이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그가 요구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작은 과일 꾸러미, 물, 화이트 와인, 와인 따개.’
또 그의 마지막 주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거기 없는 것처럼 행동해주시오.’(‘I'm Not There’·딜런의 노래 제목이자 그의 삶을 다룬 2007년 영화 제목)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의식하지 말고 편하게 행동하고, 본인도 간섭받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오죽하면 그의 매니저가 “나도 딜런과 얘기한 적이 없다”는 농담을 던졌을까.
딜런은 1941년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정유회사 매니저로 일하던 부친과 의류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연주나 그림 그리기, 시 쓰기, 영화 보기를 즐겼다. 특히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 같은 반(反)영웅을 꿈꿨다.
스무 살이 되던 1961년 이주한 뉴욕에서 그는 당대의 실험적인 예술가나 포크 가수들과 어울렸고 카페와 라이브바를 전전하면서 통기타를 들고 자신이 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았던 우디 거스리의 원초적인 포크 음악, 1950년대 잭 케루악 같은 비트 시인들의 난해하고 실험적인 운문이 그의 음악 세계에 기반이 됐다.
베트남전에 대한 비난여론과 피임약, 마약의 대중화가 만든 자유롭고 저항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가 선보인 새로운 음악은 점차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962년 데뷔앨범 ‘Bob Dylan’을 냈지만 2집 ‘The Freewheelin' Bob Dylan’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포크 트리오 피터 폴 앤드 메리가 반전(反戰) 메시지를 담은 딜런의 곡 ‘Blowin' in the Wind’를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려놓으며 딜런은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포크 음악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평단과 대중은 그를 ‘포크의 영웅’을 넘어 ‘우리 세대의 대변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딜런은 유명 여성 포크 가수 존 바에즈와 교제하면서 미디어의 주목도 받았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딜런의 음악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가슴 뛰게 하는 로큰롤과 다리 떨기 춤, 프랭크 시내트라의 비단결 같은 목소리 중 딜런이 가진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대중이 모래알 씹는 것 같은 그의 서걱거리는 목소리에 담긴 괴팍한 운문의 매력에 빠져들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한번 점화된 딜런 신드롬이 번지는 데 필요한 시간은 짧았다. 1964년 3집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이름의 타이틀곡은 앞서 발표된 ‘Blowin' in the Wind’와 함께 미국 내에서 반전과 인권 운동의 송가로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
1988년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2000년에는 ‘음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폴러 뮤직 프라이즈를 스웨덴 왕실에서 받았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자유의 메달, 2013년 프랑스 레지옹도뇌르를 수훈했다. 딜런은 올해 발표한 37번째 정규 앨범까지 1억3000만여 장의 음반을 판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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