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25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스리랑카 부활절 폭탄 테러를 계기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국가들의 종교 및 민족 갈등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스리랑카를 비롯해 인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은 제국주의 시절 열강의 지배를 받았고 민족, 인종, 종교 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과거 열강이 식민통치를 위해 종교, 민족 갈등을 부추겼다면 현대에 들어서는 이를 이용한 종파 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소수 민족 및 교도를 향한 탄압과 박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온건파 무슬림’이 집권했던 지역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와중에 중동에서 밀려난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무장단체까지 이 지역을 파고들면서 유혈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언제든 ‘제2, 제3의 스리랑카’ 비극이 재연될 위험성을 지닌 셈이다.
○ 싱할라-타밀 내전 종식 10년… ‘새로운 적’으로 갈라진 스리랑카
스리랑카는 과거 오랜 세월 동안 불교도가 다수인 싱할라족과 힌두교 타밀족이 반목해 온 나라다. 영국은 스리랑카를 식민통치하며 소수의 타밀족이 다수의 싱할라족을 지배하는 ‘분리통치’ 정책을 추진했다. 잠재해 있던 갈등은 1948년 스리랑카 독립 후 정부가 싱할라족 우대책을 쓰며 표면화됐다. 이에 반발한 타밀족은 반군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를 창설하고 두 민족 사이의 내전은 1983년부터 2009년까지 26년간 이어졌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두 민족의 갈등으로 대통령과 총리가 살해당했으며 수십 명의 정치인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에 따르면 30년 가까운 내전으로 4만 명의 타밀족이 목숨을 잃었다.
내전이 종식된 지 10년 만인 올해 스리랑카는 이번 부활절 테러 이후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 사건은 특히 스리랑카 내에서도 소수파로 분류되는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점에서 과거 갈등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12년 스리랑카 인구통계에 따르면 불교 70%, 힌두교 12%, 이슬람과 기독교(가톨릭 포함)는 각각 10%와 7%를 차지한다.
스리랑카 정부가 주범으로 지목한 ‘내셔널 타우히트 자마트(NJT)’는 스리랑카 동부의 무슬림 거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테러로 종교 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무슬림을 상대로 한 폭력 사태도 벌어졌다.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스리랑카 네곰보 인근 마을에서는 이달 5일 가톨릭교도들이 무슬림 소유 상점과 차량을 부수는 소동이 발생해 스리랑카군이 계엄령을 내리기도 했다.
스리랑카의 저명한 국회의원이자 인권변호사인 M A 수만티란은 최근 NYT 인터뷰에서 “(싱할라-타밀 내전 종식 후) 10년간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와 안전을 누릴 수 있었다”며 “(테러 후) 새로운 적이 생겼고 증오심은 여전하다”고 전했다.
○ ‘온건 이슬람’ 동남아에 파고든 IS
이번 스리랑카 테러는 IS가 배후를 자처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IS가 이번 테러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테러 가담자의 일부는 IS에서 직접 훈련을 받은 이들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실제로 이번 스리랑카 테러의 주동자로 지목된 NJT의 리더 자흐란 하심은 IS가 유포한 영상 선전물에서 “불신자들을 파괴하자”며 ‘지하드(성전)’를 부르짖기도 했다.
서방 언론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온건 이슬람’의 상징이던 동남아 지역에서 IS가 세를 확장하는 현상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이라크 모술, 시리아 락까 등에 거점을 두고 활동을 벌여왔던 IS는 최근 중동에서 패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파편들은 중동에서 멀지 않은 동남아시아 지역 등으로 확산됐다는 분석이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최근 인도와 동남아시아 국가 등 남부 아시아 지역이 IS의 새로운 타깃이 됐다는 기사에서 “이번 스리랑카 테러를 통해 IS의 영향력이나 브랜드 파워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가설이 더욱 확실해졌다”고 전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전 세계 18억 명의 무슬림 중 약 60%가 거주해 IS 같은 극단주의 단체가 활동하기 용이한 조건을 지녔다. 실제로 무슬림 인구가 다수이거나 일정 규모 이상 되는 국가에서는 IS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확대되는 중이다. 또 정치적으로 민주화되며 온건한 방향으로 변하던 이슬람 국가도 최근 이슬람 원리주의가 전반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동남아의 대표적인 이슬람 국가 브루나이는 최근 동성애와 간통죄에 대해 투석사형을 처하는 형법을 공포해 국제사회에 논란이 일었고 이후 보류 방침을 밝혔다.
이슬람교가 주요 종교가 아닌 나라에서도 소수 민족 및 종교에 대한 차별이 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커지면서 IS 세력이 침투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필리핀 남부 이슬람 자치지구인 민다나오 지역에서는 올해 성당 자살폭탄 테러와 이에 대한 이슬람사원 보복 테러 등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지역에서는 IS를 추종하는 토착 반군이 활동하는데 필리핀 정부의 차별에 대항하는 당초 활동 목적보다는 종교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세속화된 이슬람교에 대해 불만을 가져왔던 IS는 오랫동안 동남아시아 진출에 공을 들여왔다”며 “스리랑카 테러 이후에도 동남아 지역과 인도 등을 중심으로 한 IS 테러는 지속적으로 발생할 위험이 높다”고 분석했다.
○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상흔… 종파주의 정치 확산
비단 극단주의 이슬람교뿐 아니라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남부 지역 국가들의 내부 갈등은 민족, 계급 등 다양한 이유로 야기된다. 또 대다수 갈등은 각 나라의 역사적 비극과도 맞닿아 있다.
미얀마 군부의 소수 민족 로힝야족 학살은 대표적인 사례다. 미얀마의 비극 역시 식민통치와 무관하지 않다. 로힝야족은 미얀마가 영국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인구의 70%에 달하는 버마족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방글라데시에서 유입된 이주민이다. 불교도가 다수인 미얀마에서 소수 무슬림인 로힝야족은 1948년 미얀마가 영국에서 독립한 뒤 1962년 불교도 출신 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탄압이 거세졌다. 2012년에는 심각한 유혈 충돌이 발생했고 미얀마 정부와 로힝야 반군의 충돌로 최근까지 민간인 수천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미얀마 인근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 불교 국가에서도 극우 불교도가 영향력을 키우면서 소수파에 대한 차별이 심화된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편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에서는 원주민과 화교 사이의 갈등이 깊다. 인도네시아 화교는 인구의 3% 남짓이지만 부의 70% 이상을 독점해 질시와 반감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수하르토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일부 화교들이 공산당 지지자로 몰려 처형됐다. 1998년 자카르타 폭동 때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1000명 이상이 발생했으며, 강도 강간 피해도 속출했다. 당시 숱한 화교가 싱가포르 등으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대선을 치르며 온건파로 분류되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BBC 등은 최근 과격 무슬림이 늘어나면서 화교들이 향후 발생할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화교들이 다니는 인도네시아 교회 수백 곳이 강제 폐쇄되기도 했다.
뿌리 깊은 갈등은 현실 정치에 이용되며 분열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이달 9일 집권 1주년을 맞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 역시 지지율에 발목이 잡혀 인구 다수인 말레이계에 휘둘리는 모양새다. 지난해 5월 총선에서 61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낸 말레이 신정부는 애초 말레이계에게 제공됐던 대입 정원 할당과 정부 조달 계약 혜택 등을 없애기로 계획했지만 반대에 부닥치면서 애초 계획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극우 민족주의는 동남, 서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NYT는 지난달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 아시아 지역에서 소수 종교에 대한 공격이 심화되는 상황을 소개했다. 특히 4월부터 총선이 치러지고 있는 인도에서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도국민당(BJP)이 인구 80%의 힌두교 표심을 얻기 위해 종교 간 대립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는다. 힌두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2014년 5월부터 집권해 온 모디 총리는 집권 기간 동안 무슬림과 이민자에 대한 배척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실제로 모디 정권에서 무슬림과 이주민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급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인도에서는 미얀마 내 탄압을 피해 이주해 온 로힝야족 캠프에 대한 화재가 수차례 발생했으며, 기독 구호단체가 인도 정부의 규제 강화로 철수하기도 했다. NYT는 “민족과 종교에 기반한 정치적인 목소리가 늘어나면서 종교적 세속주의는 약해지고 있다”면서 “스리랑카 테러 등은 (한 나라 안에서) 종교의 공존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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