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라는 두 현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을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안보와 경제를 분리시키는 양다리 외교는 미중 패권경쟁의 무대가 된 아시아 각국에서 이미 일반적인 현상이 될 만큼 많은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호주다. 18일 호주 토니 애벗 총리는 베트남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베트남 군인들이 호주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하고 호주-베트남 연합 군사훈련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로이터통신은 19일 “영토 분쟁이 있는 남중국해에서 무력을 사용하며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호주는 이처럼 안보 면에서 대중국 견제 노선을 선언하면서 13일에는 중국이 주도하는 신금융질서인 AIIB 동참 의사를 밝혀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제1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경제적 실리를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호주는 지난해 11월에는 9년을 끌어온 자유무역협정(FTA)을 중국과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안보 측면에서는 미국과 더 가까워지는 형국이다. 2011년 11월 줄리아 길라드 당시 총리는 캔버라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 북부 다윈에 미 해병을 상시 주둔시키고 전투기와 핵무기 탑재 함정 등도 호주 군 시설을 수시로 이용하는 데 합의했다. 미 해군의 호주 주둔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약 60년 만이었다. 당시 미국과 호주 양국은 “호주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은 중국의 공격적인 태도에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못 박기도 했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Pivot To Asia)’ 정책에서 호주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베트남과 필리핀 역시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을 확대하면서도 군사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필리핀은 지난해 4월 미국과 방위협력확대조약(EDCA)을 체결해 1992년 미군이 수비크 만 해군기지에서 철수한 이후 20여 년 만에 다시 주둔하는 길을 터줬다. 또 2011년 11월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마닐라를 방문해 미국 구축함 피츠제럴드 선상에서 미국과의 동맹조약 60주년 기념식을 갖는 등 군사관계를 강화했다.
중국 관영 환추(環球)시보는 19일 자에 “AIIB는 개발도상국의 절박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것이어서 중국과 해양 갈등이 있는 필리핀 베트남도 적극적으로 가입했다”는 베이징(北京)대 국제관계학원 왕융(王勇) 교수의 분석을 실었다. 아시아 각국의 정경 분리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 판단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취지로 풀이된다.
인도도 중국과 카슈미르 지역 등에서 무력충돌까지 하며 국경 갈등을 빚고 있지만 경제 협력에는 매우 적극적이다. 일찌감치 AIIB 가입을 선언한 인도는 지난해 7월에는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과 함께 중국이 주도하는 신개발은행(NDB) 설립에도 동참하기로 합의했었다. 서아시아의 터키가 최근 중국 장거리 방공 미사일 시스템인 ‘훙치(紅旗)-9’를 구매키로 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터키는 입찰에 참여한 미국 러시아를 제치고 낙찰에서 30% 이상 싼값을 제시한 중국산을 선택했다. 그 무기를 사서 누구를 견제하더라도 싼값에 구매하는 등 실리를 먼저 챙겼다는 분석이다.
김흥규 아주대 중국정책연구소 소장은 “지금 국제질서는 미국 중국 어느 나라도 우리만을 따라오라고 압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면서 “따라서 양국의 경쟁 사이에 낀 국가들은 오히려 ‘전략적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고래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 꼴이 되느냐, 아니면 명분과 실리를 함께 챙기는 전략적 기회로 활용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외교 역량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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