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은 미국에도 활짝 열려 있다. 생각 바뀌면 언제든 전화해라.”
21일 미국 워싱턴의 간판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 대회의실에서 백발의 중국인이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120여 명의 청중 사이에선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미국인들은 주로 쓴웃음을 지었고, 중국인들은 ‘와’ 하며 환호했다. 주인공은 중국 경제 굴기의 상징인 AIIB 초대 총재로 지명된 진리췬(金立群·66·사진). 중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를 지내는 등 국제 금융무대에서 활약해 온 진 지명자는 외교관을 능가하는 완벽한 영어로 좌중을 압도하며 미국 주도의 금융 질서에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1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특별강연에서 중국 굴기에 대한 자신감과 미국의 대중 정책에 대한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중국은 AIIB를 운영하면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출 것을 내가 100% 보장한다”며 “미국은 무엇이 무서워 AIIB의 출범을 이리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AIIB는 미국이 주도한 세계은행의 막내 형제뻘 아니냐”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최근 잇따라 “중국이 (AIIB 등으로) 세계경제 질서를 쓰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을 겨냥한 것. 진 지명자는 여러 차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날 발언이 시 주석의 메시지임을 시사했다.
그는 한국을 비롯해 영국 등 57개국이 AIIB에 가입한 것을 언급하며 “중국엔 아직 7000만 명이 빈곤 속에 있다. AIIB를 통해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 투자를 강화해야 글로벌 균형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의 말에는 미국과 글로벌 패권을 놓고 한판 붙겠다는 중국의 각오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진 지명자는 “미국이 AIIB에 가입하면 중국도 미국이 주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말한 뒤 “아시아의 인구와 폭발적인 시장 팽창을 결코 무시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한 미국인 참석자는 “오늘 진 지명자의 발언을 들으니 지난달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얼마나 날카로운 대화가 오갔는지 짐작이 간다”며 “중국 주도의 AIIB는 미중 글로벌 대전의 전초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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