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27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여느 때처럼 참석자들은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인 김복동 할머니(90)는 길원옥 할머니(87)와 함께 일본 구마모토(熊本) 현 강진 피해 구호 성금 130만 원을 내놓으며 “바로 옆 나라에서 일어난 참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조금씩이라도 보태 도와주자”고 힘주어 말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는 “두 할머니가 집회 하루 전 일본 지진 피해 모금의 뜻을 밝혔다”며 “정치적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인도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할머니들의 뜻”이라고 전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의 위안부 만행을 고발하고 규탄하는 국내외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일본을 돕자고 하는 것일까.
김 할머니는 21일 정대협을 통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일본이라는 전체 테두리로 봐서는 안 된다”며 “위안부 피해에 대한 사과 요구는 ‘일본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큰 재난을 당해 고통받는 일본인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평화를 위해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할머니는 “지진이 발생한 일본 구마모토 지역은 우리 동포와 한국 문제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일본인들이 많은 곳”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두 할머니가 이렇게 나선 배경에는 급격히 악화된 한일 양국의 관계가 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와 달리 이번 구마모토 지진과 관련해서는 도움의 손길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동일본 대지진 때는 한 달여 만에 588억 원 이상의 성금이 걷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일본 대지진 성금 588억 원은 2010년 아이티 지진 이후 한 달 동안 주요 단체가 모은 205억여 원의 3배 가까운 금액으로, 우리 국민이 해외 지원을 위해 모은 성금 가운데 역대 최고액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번엔 냉랭하기만 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위로전’을 보내 사태 수습을 위한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민간 차원의 지원 활동은 지지부진하다. 일본 항로를 운영하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대한항공이 재난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해 성금 또는 담요, 생수 등의 물품을 긴급 지원한 정도다. 오히려 온라인에서는 “구마모토에 사는 조선인(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일본 내 혐한(嫌韓) 루머를 언급하며 “일본에 대한 지원은 매국 행위”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이 같은 배경에는 아베 정부가 한일 양국의 역사 문제를 ‘왜곡’ 수준으로까지 몰고 가고 있는 데 대한 우리 국민의 감정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12월 일본 정부가 발표한 위안부 문제 해법에 진정성이 없고, 재단 설립 등을 통한 위안부 피해보상 약속 역시 우리의 요구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이웃이다”며 “국가 간에 요구할 것은 요구하면서도 이웃사촌끼리는 잘 지내야 한다. 국가를 넘어 그 나라 사람까지 미워하면 한일관계는 완전히 깨질 수 있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를 포함한 정대협 관계자들은 무엇보다 한일 양국 국민의 감정이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 우리 국민의 뜨거운 모금 활동 열기가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명기한 중학 교과서 검정 결과를 강행 발표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급격히 식었다. 대한적십자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은 중학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된 2011년 3월 말 이후에도 모금을 계속했지만 하루 모금 건수가 이전의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다.
정대협 윤 대표는 “다른 민간단체와도 협력해 모금 활동을 펼칠 계획”이라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먼저 지원을 호소하고 나서 반향이 클 것으로 기대한다. 매주 수요집회에서 진행 상황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정대협은 두 할머니가 내놓은 130만 원을 포함해 모금 활동을 통해 모은 성금을 곧 일본 측에 전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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