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내리자 시립병원 신축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5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지진해일(쓰나미)이 밀려왔을 때 이 병원 환자 150여 명이 고립됐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구출됐다. 사고 이후 안전한 장소를 찾아 새로 건물을 올리는 중이라고 했다.
이시노마키 시는 쓰나미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주민 3700여 명이 숨졌다. 일본 전체 사망자의 20%에 해당한다. 평야 지대의 약 30%가 침수됐다. 아직도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시내 남쪽 히요리야마(日和山) 공원에서는 여전히 황무지로 남은 해안가 피해 지역과 곳곳의 공사 현장이 눈에 띄었다. 한쪽에 참사 전 주택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같은 곳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옆에서 피해 지역의 모습을 바라보던 한 노인은 몇 번 한숨을 내쉬더니 눈시울을 닦으며 자리를 떴다.
○ “지금도 수면제 안 먹으면 잠 못 자”
이시노마키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은 굴, 미역 등을 양식하던 연안 지역이었다.
조선족 출신으로 이시노마키 오시카 반도에 정착해 굴 양식 등을 하던 안도 마유코(安藤眞由子·53) 씨는 5년 전 쓰나미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었다. 그는 “쓰나미가 왔을 때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눈앞이 캄캄해지고 패닉 상태에 빠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딸이 ‘위로 올라가야 산다’고 해 정신없이 움직였다”고 회상했다.
안도 씨는 당시 충격으로 자율 신경에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만 놀라면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굴 양식을 재개하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동안 생계를 충당하기 위해 보험회사에 다니기도 했지만 몸 상태가 나빠져 1년 동안 병가(病暇)를 냈다. 그는 “재해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어 처음에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도 힘들었다. 지난해 말부터 겨우 당시의 경험을 말할 수 있게 됐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중에는 지금도 신경쇠약, 우울증 등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피해가 컸던 미야기 이와테(巖手) 후쿠시마(福島) 현에서 재해 후유증으로 자살한 사람은 정부 집계로 지난해 11월 말까지 154명에 달한다.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시노마키의 가장 큰 가설주택 단지의 경우 주민 약 2500명 중 250명가량이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 기약 없는 가설주택 생활… 재기의 노력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안도 씨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며 주변 임시주택에 사는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사쿠라회’를 만들었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면서 수세미, 카드 등을 만들어 자원봉사를 하러 왔던 지인들에게 팔고 있다. 그는 “재해 전 오시카 반도에 7000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절반도 채 안 남았다”며 “어떻게든 서로 도와가면서 아픔을 극복하고 쓰나미에 대한 것을 잊지 않도록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오가타지구부흥협의회 사무국장인 하마하타 미키오(濱畑幹夫·57) 씨는 텔레비전 토론회에 출연해 정치인들에게 쓴소리를 했던 지역 내 유명 인사다. 이시노마키 외곽에서 컨테이너 카페를 운영하는 그는 지역 부흥과 피해자 자활을 위해 부인과 함께 가설주택 거주 여성들을 모아 손수건을 만들고 있다.
2일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만난 하마하타 씨는 “대지진 후 도쿄 등으로 빠져나가는 이들도 많지만 이곳을 지키며 노력하는 것이 동북지역의 긍지”라며 “마진이 박하다 보니 손수건을 만들어도 적자지만 다들 열심히 일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피 과정에서 손발이 언 채로 얼굴만 가린 채 바닥에 누워 있던 시신 수십 구를 목격했다. 오가타 초등학교에서 무더기로 희생된 아이들을 봤을 때는….”
한국 출신으로 2006년 결혼과 함께 이시노마키에 정착했다가 쓰나미로 집을 잃은 곤노 리카(今野李花·47) 씨는 5년 전을 회상하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곤노 씨는 “이후 비좁은 가설주택에 5년째 살고 있다. 한참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고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 충동이 일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 며칠 동안 귓가에서 쓰나미가 다가오는 소리,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됐고 당시 일도 조금은 얘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지진이 터진 뒤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설주택에 거주하는 이들이 18만 명이나 된다.
▼ “엉터리 피난 매뉴얼 따르다… 어린 학생들 74명 숨져” ▼
아물지 않은 오가와초등교의 상처… “세월호 유족들 내달 방문 추진”
“구할 수 있었던 귀중한 목숨이 희생됐습니다.”
‘작은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는 모임’의 사토 도시로(佐藤敏郞·53) 대표의 목소리에서는 희미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는 2011년 지진해일(쓰나미)이 학교를 덮치면서 발생한 ‘오가와 초등학교 참사’ 때 초등학교 6학년 딸을 잃었다. 당시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에 있는 이 학교에서는 학생 108명 중 74명, 교사 13명 중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학교는 해안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어 대피할 시간이 충분했다. 하지만 학교 측이 45분 동안이나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교육위원회 조사 결과는 ‘매뉴얼 사회’인 일본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피난 매뉴얼에는 ‘높은 곳’이라고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장소는 명시돼 있지 않았다. 시 매뉴얼도 학교까지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다. 일부 교사들이 뒷산으로 대피하자고 했지만 “나무가 쓰러질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와 무산됐다. 마침 교장은 학교에 없었다.
중학교 교사였던 사토 씨는 강연을 다니며 참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사토 씨는 “최근 세월호 유가족 일부가 사고 5년을 맞아 3월 11일에 오가와 초등학교를 방문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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