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6, 27일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하기로 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내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 직후 미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미국 행정부 교체기를 맞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임기 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역사적 화해 작업을 마무리하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력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 확장에 나서겠다는 속내를 담고 있다. 아베 총리는 또 내년 1월 중순엔 호주,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태평양 4개국을 방문하는 방안을 관련국들과 조율하고 있다.
NHK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6일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과 만나 “진주만의 USS애리조나기념관을 방문해 희생자를 위령하고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미래를 향한 결의를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진주만 방문 계획을 공개한 직후 주변에 “일본의 ‘전후(戰後)’는 완전히 끝났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다음 총리부터 진주만은 역사의 한 장면이 되는 게 좋다”고 말했다. 패전국 낙인이 찍혀 사죄를 거듭해야 했던 전후 질서를 이참에 끝내고 싶다는 것이다.
카터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과 나에게 기쁜 일이다. 쌍방이 평화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보여야 한다”며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을 환영했다. 아베 총리는 이어 트럼프 당선인 취임(내년 1월 20일) 직후인 1월 27일을 전후해 미일 정상회담을 여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교도통신이 6일 미일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은 트럼프가 미 대통령에 당선된 뒤 최종 결정됐다. 트럼프 당선인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수천 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트럼프가 취임하면 이곳 방문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0일 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오바마 대통령에게 “언젠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낼 때 함께 진주만에 가면 어떤가”라고 제안했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아베 총리의 연설은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와 함께 ‘과거를 딛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는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 보수층의 반발을 의식해 직접적인 사죄 발언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6일 정례 브리핑에서 “이번 방문은 전몰자 위령을 위한 것으로 사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며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아베 총리가 과거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와 중국 침략 등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사죄 없는 진주만 방문은 과거에 대한 반성의 뜻을 진정으로 나타내겠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베 총리의 전략적인 대미 행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군사적인 진출과 영유권 확대를 노리는 중국에 대한 견제 성격도 담겨 있다.
하지만 미일 간 역사적인 화해를 지켜보는 한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일본과의 과거사 논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후 역사적 화해에 대한 압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6일 “역사를 이용해 일본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는 중국과 한국에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을 통해) 일본의 적이었던 미국조차 이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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