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이 마침내 브렉시트(Brexit), 즉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했다. 24일(현지 시간)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탈퇴 51.9%, 잔류 48.1%로 최종 집계되면서 1993년 ‘하나의 유럽’을 내걸고 출범한 EU는 위기를 맞았다. 1973년 유럽공동체(EC) 가입을 출발점으로 하면 43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계속된 유럽 통합의 물결로 치면 70년 만에 분열한 것이다. 당장 영국 파운드화 환율이 곤두박질치며 화폐가치가 31년 만의 최저로 떨어지고, 한국 증시는 시가총액 47조 원이 증발하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부터 지각변동이 나타났다.
세계 5위 경제대국인 영국의 EU 탈퇴는 단순히 한 국가의 국제기구 탈퇴에 그치지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低)성장, 저임금, 저고용의 ‘뉴 노멀 시대’가 닥치면서 EU가 상징하는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와 시장 친화적 국제주의, 정재계 엘리트 계층이 이끄는 세계화와 경제 성장의 논리가 힘을 잃고 있다는 전조다. 눈앞의 이익만 겨냥한 ‘성난 포퓰리즘(Angry Populism)’과 국수주의(國粹主義), 신(新)고립주의가 쓰나미처럼 세계를 덮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옛 소련의 종말을 몰고 온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처럼 브렉시트는 글로벌 정치 경제적 질서에 격변의 파도를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집권 보수당 내부의 갈등 봉합과 총선 승리를 위해 2013년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선언했지만 결국 나라를 계층별, 세대별, 지역별로 찢어놓고 물러나게 됐다. 탈퇴 찬성파에는 저소득층 중장년층과 비(非)수도권이, 잔류파에는 고소득층 청년층과 수도권이 집중돼 있다. 다수 영국인이 난민의 대량 유입을 허용해 일자리를 뺏어가는 EU 체제에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 EU를 탈퇴하면 2년 내 일자리 50만 개가 사라지고 국내총생산(GDP)은 3.6% 하락한다는 지식인들의 이성적인 경고는 ‘잃어버린 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이들의 감성 앞에 무력했다.
이 같은 대중의 정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덴마크 등 다른 회원국들의 극단적 정당과 맞닿아 EU 추가 탈퇴 움직임을 부추길 공산이 없지 않다. 올해 대선을 치르는 미국서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불 지른 증오심과 보호주의 정서가 한층 악화될 수 있다. 이민 갈등과 종교 대립, 일자리 다툼은 EU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만약 EU와 미국 등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면 한국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18세기 산업혁명의 발생지로 세계화를 이끌며 번영을 구가했던 대영제국이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섬나라의 고립주의 속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세계사의 역설이다. 영국이 탈퇴 협상을 벌이는 2년간, 정부는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은 물론 지정학적 갈등에 대비해 다양한 시나리오별 플랜을 가동해야 할 것이다. EU 차원의 대북제재 방안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금융과 환율시장의 파장이 가뜩이나 불안한 실물경제를 뒤흔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증시의 외국계 자금 중 영국계는 36조 원으로 미국계 다음으로 많다. 이 자금이 안전자산을 찾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면 증시 폭락에 그치지 않고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가뜩이나 부진한 수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EU 경제의 17%를 차지하는 영국 경제가 위축되고 중국의 유럽 진출 전략이 흔들리면서 EU와 세계 경제가 도미노 식으로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수출 주도 산업구조인 한국 경제는 재정·통화정책이 통하지 않는 기능 부전의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새누리당과 정부는 긴급회의에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경제성장률 조정까지는 검토하지 않는다”고 의견을 모았지만 안이한 결론이다. 코스닥이 장중 한때 7% 이상 폭락해 사이드카까지 발동된 마당에 ‘영국과 우리 경제가 직접 연결된 부분이 많지 않아 괜찮다’고 해서는 국민의 불안감을 덜 수 없다. 다음 주초로 예정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발표 시기를 늦추더라도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양극화를 놓고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분노의 포퓰리즘’ 쓰나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정치권은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4·13총선에서 예상을 뒤엎은 새누리당의 참패는 기득권 계층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한국판 브렉시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성장이 고착되면서 청년 실업률은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결혼이주자를 포함한 다문화 인구는 이미 200만 명을 넘어섰다. 한국의 사회갈등 관리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27위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나라를 계층별, 세대별, 지역별로 갈라치기 하는 정치인들은 캐머런 총리의 불명예 퇴진을 똑똑히 보며 교훈을 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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