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답답했다. 묵직한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23일 최정희 씨(46·여)는 그렇게 하루 종일 힘들었다. 최 씨는 고3 딸을 둔 어머니다. 딸은 ‘포항 수험생’이다. 이날은 일주일 연기됐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날.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딸 정보권 양(18) 생각에 최 씨는 마음이 무거웠다.
최 씨 가족은 15일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 기약 없는 대피소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처음 대피소에는 베개는커녕 바닥 보온재도 없었다. 시험공부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껏 휴대전화로 온라인 강의를 보는 수준이었다. 딸은 새벽 찬바람에 수시로 잠을 깨더니 결국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 19일부터는 경북 포항의 한 호텔로 겨우 거처를 옮겼다. 다만 두 사람만 머물 수 있었다. 승용차로 딸의 등교를 도맡아야 하는 아버지 정해승 씨(50)가 딸 곁을 지켰다. 최 씨는 둘째 딸 정윤권 양(13)을 챙기느라 대피소에 남았다.
결국 수능일에 싸주려던 엄마표 도시락은 챙기지 못했다. 당초 시험 전날인 15일에 도시락용으로 준비했던 김밥 재료가 자꾸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22일 대피소에서 어떻게든 도시락을 챙길까 했지만 주변 환경 탓에 포기했다. 최 씨는 딸에게 미안해 아침에 시험장에 가지도 못했다. 최 씨는 “호텔에서 도시락을 챙겨줬지만 엄마 손맛보단 덜하지 않을까요”라며 안절부절못했다.
정 씨는 전날 승용차로 포항여자전자고 시험장을 답사했다. 도로 사정을 미리 익혀두기 위해서다.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딸에게 정 씨는 “평소대로 파이팅”을 외치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정 씨는 “그렇게 힘든 환경을 견디고 시험 보러 가는 딸이 정말 대견하다”고 말했다.
오전 9시경 최 씨는 불안한 마음과 딸에 대한 걱정을 잠시나마 잊으려는 듯 짧은 머리를 질끈 묶고 옷과 담요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어 이동식 세탁소에 보낼 옷가지를 분류하며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정리를 마친 최 씨는 딸이 무사히 시험을 마치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정성껏 기도했다. 잠시 기도를 쉴 때면 행여 여진이 발생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오후 4시경 최 씨는 딸이 있는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 종료 30분 전. 딸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학교 건물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후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최 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시험 끝났어요. 빨리 나갈게요’라는 딸의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곧이어 교문 주변에서 박수가 터지고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 씨는 멀리서 오던 딸에게 달려가 안았다. 얼굴을 어루만지며 “고생했다”고 말했다. 딸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고마워요”라고 답했다.
“국어 시간에 조금 긴장했는데 이후에는 모의고사처럼 쳤다. 지진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다”며 웃는 딸의 머리를 최 씨는 대견한 듯 연신 쓰다듬었다. 이날 최 씨 가족은 나흘 만에 한자리에 다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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