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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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닭의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달력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20’이라는 붉은 글씨가 눈에 띕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이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지만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붉은색 법정 공휴일은 사라졌습니다.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선정했습니다.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엄동설한을 녹여낼 만큼 뜨거운 열망이 사회의 썩고 곪은 환부를 도려낼 힘을 주었습니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사유화하고 숭고한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 세력들을 몰아낸 것은 ‘파사’의 시작입니다. 새로 탄생한 정권의 역사적 사명은 ‘현정’이겠지요.

국정을 농단한 혐의로 여러 사람이 구속되고 재판받고 있지만 사과나 반성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장본인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 법정에서 한 말입니다.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독일이 점령한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체포해 강제 이주시키고 집단 학살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독일 패망 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자동차공장 노동자로 살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 정보원들에게 체포됐습니다.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역사의 법정은 1961년 12월 15일 사형을 선고합니다. 이듬해에 교수형이 집행돼 아이히만은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주변에는 또 다른 아이히만들이 좀비처럼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강한 카리스마도, 피에 굶주린 듯한 악령의 모습도,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힌 고집불통의 모습도 없었다.’ 잡지 ‘뉴요커’의 취재원 자격으로 재판 과정을 취재했던 해나 아렌트의 말입니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충실히 따른 평범한 공무원이자 동네 아저씨였던 겁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사진)이라는 저서를 통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고발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악행은 미치광이처럼 특별한 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동을 당연시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아렌트는 주장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더욱 커진 차별과 낙인의 블랙리스트, 편법과 특혜의 바벨탑은 어쩌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아이히만들이 쌓아 올린 것일지 모릅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거나, 생각 없이 부당한 명령에 순응하거나, 자신의 행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유하지 않는 곳에 아이히만은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을 겁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
#제19대 대통령 선거일#홀로코스트#아돌프 아이히만#악의 평범성#해나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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