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폭력 시위까지 감행하면서 정부의 노동 개혁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 개혁은 기존 정규직·중장년층 근로자의 정년을 늘려 저출산·고령화 시대를 대비하는 한편 임금피크제 등으로 이들의 근로조건을 일부 변경해 청년 채용을 늘려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노동 개혁에 반대한다. 민주노총을 구성하는 사업장 다수가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정규직, 중·장년층 조합원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 대공장 중심 노조의 악순환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은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다. 두 노조 모두 15만 명이 넘는 조합원 수를 자랑한다. 금속노조는 현대차 등 자동차 및 중공업 노조가, 공공운수노조는 철도노조 등 공공기관 노조가 대거 모여 있다. 이어 전공노(약 8만 명)와 전교조(약 5만 명)가 두 노조의 뒤를 잇는다. 결국 총 67만 조합원(민주노총 자체 집계) 가운데 64%가 ‘강성’으로 손꼽히는 4개 산별노조 소속인 셈이다.
정부가 추구하는 노동 개혁은 이들의 양보를 전제로 한다. 한국노총도 9·15 노사정 대타협에서 임금 체계 개편의 필요성, 근로시간 단축 등 일정 정도의 양보를 약속했다.
그러나 노사정 협상에 불참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런 양보를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받아들일 경우 대기업, 공공기관, 정규직 조합원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산별노조의 요구에 끌려다니면서 투쟁만 고집하다가 여론마저 등을 돌리고,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다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 대중운동이 가장 큰 무기인 민주노총이 대중의 외면을 받는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대공장 노조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지도부의 집행력과 리더십이 떨어졌고, 사회적 영향력과 개혁성도 퇴색됐다”며 “정파 갈등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정부 정책에 힘 있게 개입하지도 못하는 것이 민주노총의 현주소”라고 지적했다.
○ 가장 전투적인 한상균 지도부
민주노총이 처음부터 노동 개혁 협상에 불참한 채 ‘닥치고 투쟁’만 외쳤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4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관련 입법을 하기 위해 노사정(勞使政) 소위를 설치하고 집중 논의를 벌였고, 이 소위에 민주노총도 참여했다. 당시만 해도 민주노총은 공청회에도 참석하고, 정부와의 교섭에도 적극 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소위가 결렬되고 9월부터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가 노동 개혁 논의를 주도하자 민주노총은 협상을 거부했다. 민주노총의 ‘노동 개악(改惡) 저지’ 대정부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민주노총은 1999년 노사정위를 탈퇴한 뒤 줄곧 복귀하지 않고 있다. 정부의 들러리에 불과한 노사정위가 주도하는 논의는 거부한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여기에 지난해 12월 한상균 위원장이 사상 첫 조합원 직접선거로 선출되면서 민주노총의 투쟁 노선은 한층 더 강화됐다. 민주노총 내부의 3대 정파 중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현장파(PD계열)’로 분류되는 한 위원장의 선거 공약은 ‘전면 총파업’이었다. 당초 민주노총 ‘국민파(NL계열)’와 ‘중앙파(PD계열)’의 지지를 동시에 받은 전재환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조합원들은 한 위원장을 선택했다. 쌍용차 지부장으로 파업을 이끌면서 인지도가 높았고, 노동 개혁 국면에서 가장 열심히 싸워 줄 지도부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한 위원장도 조합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약을 충실히 이행했다. 3월 24일 이기권 고용부 장관과 한 위원장이 단 한 차례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정부와의 교섭은 전면 거부하고 두 차례의 총파업과 민중 총궐기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총파업이 현대차 등의 불참으로 사실상 무위로 끝나고 민중 총궐기마저 여론의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자 지도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한국노총이 9·15 대타협 이후에도 현재 김동만 위원장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한편 노사정 협상도 계속 이어 나가는 등 투쟁과 교섭을 병행하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박지순 고려대 교수(법학)는 “‘모든 근로자의 정규직화’ 같은 구호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전략을 바꿔서 적극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며 “양보와 타협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대화의 자세’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조직의 보수화’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노동법 등 협상 거부한채 관성적 파업만 ▼
지도부 이념적 선명성 경쟁
강경파 득세… 노사정위 거부
‘대화냐 투쟁이냐.’
갈림길에 설 때마다 민주노총은 대부분 총파업이나 대규모 집회 등 장외투쟁을 선택했다. 이 같은 강경 일변도 투쟁방식은 내부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를 거뒀지만 대중의 지지는 점점 더 멀게 만들었고, 이는 민주노총이 생존을 위해 더 강경한 투쟁을 일으키는 악순환을 낳았다.
투쟁에 방점을 찍는 민주노총의 노선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리해고 법제화 등을 담은 노동법 개정안이 여당(당시 신한국당)의 날치기로 통과되자 총파업에 나선 것. 민주노총은 출범 1년 만에 연인원 400만 명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정부를 압박했다. 당시 합법 노조가 아니었던 민주노총은 장외투쟁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고 파상공세를 펼쳤다.
결국 1997년 2월 정부는 정리해고 도입 등을 골자로 한 노동법을 재개정하겠다며 한발 물러났다. 당시에는 비합법 조직의 한계 때문에 투쟁 노선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고 이에 대한 국민적 동의도 비교적 광범위하게 얻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그 이후에도 차려진 협상 테이블마저 차고 일어서는 행태를 반복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과 동시에 설립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 대타협도 이뤄냈던 민주노총은 1년 만인 1999년 2월 정부의 합의 미이행을 이유로 탈퇴하면서 정부와 대립 각을 세웠다. 당시 지도부 선거 과정에서 이념적 선명성을 강조하면서 강경파가 득세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많았다. 민주노총은 같은 해 말 합법화됐지만 이후에도 장외투쟁을 지속했다.
2004년에는 민주노동당 소속 후보 10명이 원내로 진출했다. 민주노총 출신 정치인들이 잇달아 배출돼 노선 변화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작지 않았지만 민주노총은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정부가 비정규직법을 내놓자 총파업 카드를 내놓았다. 또 이수호 당시 위원장은 노사정위 복귀를 추진했지만 강경파의 반발에 부닥쳐 좌절됐다.
노사정위 복귀가 좌절된 이후에도 지금까지 민주노총은 노동개혁이나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한 공식 논의에는 불참한 채 관성적인 파업만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책 기능은 약해졌고, 여론은 등을 돌렸다. 이는 결국 민주노총의 조직력 약화로까지 이어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민주노총이 장내에서 대안을 내지 못하고 경영계와 정부를 설득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협상력을 낮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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