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대기시간’도 근로시간인가?…中企 주52시간제 앞두고 문의 ‘빗발’

  • 뉴시스
  • 입력 2019년 9월 29일 07시 34분


대기시간·호출대기시간 '근로시간' 판단 여부 모호
대표적 사례 버스 운전기사 대기시간 소송전 비화
대법원 "버스운전사 대기시간은 근무시간 아니다"
노동계, 법위반 소지·근로자 건강권 침해 문제제기
재계 "시간 비례 임금체계개편·근로시간 유연화" 강조
고용부 "기준마련 필요하다"면서도 노사 논의 우선 입장

근로자의 ‘대기시간’, ‘호출대기시간’은 근로시간과 휴게시간 중 어떤 것으로 판단해야 할까.

내년 1월 50~299인 사업장까지 주52시간제 확대 시행을 앞두고 요즘 기업과 정부, 그리고 노동계가 이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대기 시간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법규정이 없는 데다, 대법원 판례도 버스운수업종에 한해서만 2건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내년 1월 중소기업으로 주52시간제가 확대 적용될 경우 일선 사업장에선 혼란이 불가피하고, 이로 인한 노동계와 재계 간 소송전도 난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서둘러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29일 고용부에 따르면 최근 들어 휴게시간과 근로시간 중간 단계에 있는 대기시간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업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날 “지금까지는 근로시간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던 기업들이 주52시간 도입을 앞두고 관심이 증가하면서 대기시간, 휴식시간을 어디까지 근로시간으로 봐야 하는지 등에 대해 문의를 많이 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7월 주52시간제 첫 도입 당시 보다 대상 사업장이 8배 많아진 만큼 시행 준비에 나선 기업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시행된 300인 이상 사업장은 3500여개였고 내년 1월부터 적용받는 50~299인 사업장은 2만7000여개다.

특히 일선 사업장들이 주로 궁금해 하는 사안은 대기시간, 호출대기시간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예컨대 버스 운전사가 버스 운행을 마치고 다음 운행 전까지 대기하는 ‘운행과 운행 사이’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봐야 하느냐는 것이다.

근로시간은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종속돼 있는 시간을 말한다. 이 때문에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에 있는지가 휴게시간과 근로시간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이다.

문제는 사업장마다 상황이 다르다보니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종속돼 있는지를 일률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버스운전 기사 윤모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은 대기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2심은 대기시간에 휴식 뿐 아니라 주유, 세차, 청소 등의 업무가 이뤄졌기 때문에 휴게시간으로 충분히 활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다시 뒤집었다. 윤씨가 회사의 ‘감독’ 없이 자유롭게 휴게시간을 보낸 것을 볼 수 있다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근로자가 작업시간 도중에 실제로 작업에 종사하지 않는 휴식시간이나 대기시간이라 하더라도 근로자의 자유로운 이용이 보장되지 않고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받는 시간은 근로시간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며 “근로계약에서 정한 휴식시간이나 대기시간이 근로시간에 속하는지 휴게시간에 속하는지는 특정 업종이나 업무의 종류에 따라 일률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해당 사업장의 구체적 업무 방식, 휴게 중인 근로자에 대한 사용자의 간섭이나 감독 여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휴게 장소의 구비 여부, 근로자의 실질적 휴식이 방해됐는지,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인정할 만한 사정이 있는지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개별 사안에 따라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작년 6월에도 버스운전사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소송에서 “대기시간 전부를 근로시간으로 판단해 초과근로수당으로 인정한 원심 판단은 잘못됐다”고 판결한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버스운전사들이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하고 개인 용무를 위해 외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용자가 호출할 때 빠른 시간 내에 근로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을 뜻하는 ‘호출대기시간’도 논쟁의 대상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대기시간, 호출대기시간 등에 대한 법 위반 소지와 근로자 건강권 침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한국노총 유정엽 정책실장은 “업무수행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작업준비시간과 대기시간이 근무시간에서 배제되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특히 의료보건업종에서는 이른바 온콜(ON-CALL) 제도 시행으로 근무시간 이후에도 순번제 ‘자택대기근무’를 하고 있는데 호출시 이동시간 등에 대한 노동시간 인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영계는 장시간근로 문화가 바뀌고 있는 만큼 시간에 비례한 임금체계도 개편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일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근로시간 유연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헙회(경총) 김영완 노동정책본부장은 “과거에는 쉬는 것과 충분한 대가 중에 충분한 대가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던 게 사실”이라며 “산업화 초기에 마련된 시간에 비례한 임금 방식이 장시간근로의 유인으로 작용해 왔는데 (장시간근로 문화가 바뀌고 있는 만큼) 근로시간 길이로 성과를 측정하는 낡은 방식에 대한 개편이 필요하다. 직무 성과에 따른 임금체계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또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일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고용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는데 근로시간은 시간에 비례해 1대1 기준으로 가자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며 “집중근로와 집중휴식이 가능한 분들에 대해서는 좀 더 유연성을 열어주는 등 근로시간 단축에 대비해 다양한 근로시간 유연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선진국들은 근로시간 제도나 한도에 대해 노사 합의 영역을 우리나라보다 폭 넓게 두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근로시간 제도를 촘촘하게 나열하면서 상세한 내용들을 기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학계에선 당장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주52시간제 시행을 앞두고 있는 만큼 애매모호한 부분에 대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화여대 박귀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호출대기가 근로자의 자유시간을 어느 정도 침해하거나 통제하게 되는 것인지를 중심으로 일정한 판단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며 “또 완전한 근로와 휴게의 중간 단계에 있는 시간에 대해 법적으로 어떻게 규율할지 고려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대기시간, 호출대기시간 등에 대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면서도 노사 간 논의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대기시간, 호출대기시간과 관련해 판례도 거의 없고 깊이 있게 연구된 게 없기 때문에 (당장 기준마련이 쉽지 않다)”라면서 “어디까지 근로시간을 볼지에 대해 논의가 필요한 것 같다. 노사 간 논의를 진행하고 정부도 함께 대화하면서 기준을 만들어야 될 부분”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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