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특정 기업의 이사 선임이나 해임을 요구할 수 있는 경영참여권을 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연금 관치’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특히 기금운용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업 경영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경우’를 경영참여권 행사의 전제조건으로 달아 재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기업 경영 환경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면 국민연금이 간섭할 수 있는 사례를 세부적으로 밝혀 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복지부는 이와 관련해 별도의 기준이나 가이드라인을 만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될 가능성”
박 장관은 30일 “한두 명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전체적인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서 경영 참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 제한적으로 (경영 참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연기금의 수익을 희생하더라도 주주권을 행사한다는 뜻이냐”는 물음에 “기금운용위원회의 1차 목표는 연기금의 수익성”이라며 “수익성이 저해되는 방향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경영 참여의 대상이 되는 ‘기업 경영가치 훼손’에 대해선 아무런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박 장관이 “기업 경영가치 훼손으로 ‘사회적 여론’이 형성됐을 때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하면 (경영 참여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라고 부연한 것이 전부다. 또 다른 복지부 관계자는 “경영 참여의 대상이 되는 사례의 구체적인 기준이나 가이드라인을 만들진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여론’을 언급한 것은 결국 정부의 입맛대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의 성과를 주식과 무관한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특정 기업에 대한 ‘마녀사냥’이 될 수 있다”며 “구체적 기준 없이 여론이 들끓으면 경영에 간섭하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 “기금운용 독립성-전문성 허약”
이런 우려의 배경엔 기금운용위원회가 경영권 참여를 할 만큼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기금운용위원 20명 중 8명은 관련 부처 장차관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국책연구원 원장 등 정부 인사다. 여기에 시민단체와 농협·수협이 추천한 지역가입자 대표 4명, 근로자 대표 3명을 더하면 15명으로 전체 인원의 4분의 3이 된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지낸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국민연금의 의사 결정이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식견에 따라 이뤄지는지 되물어야 한다”며 “지배구조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9명)를 전문가 중심의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14명)로 확대 개편하는 내용도 스튜어드십 코드에 담겼지만 이 역시 현재의 지배구조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원을 결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추천을 받아 위촉하는 형태라면 정부 편향 인사 위주로 꾸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결국 지금처럼 정부의 영향력이 미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635조 원의 연기금을 굴리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의 최고위직 9개 자리 중 기금운용본부장(CIO)을 포함한 5개가 공석이라는 사실도 고민이다. 모든 의결권 관련 사안은 기금운용본부가 1차적으로 검토한다. 하지만 현재처럼 기금운용본부 조직이 불안정한 상황에선 특정 기업의 경영 활동이 ‘심각한 경영가치 훼손’에 해당하는지, 국민연금의 개입이 수익성 개선에 도움이 될지 제대로 분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 ‘10%룰’ 완화엔 신중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를 확대하려면 자본시장법의 ‘5%룰’과 ‘10%룰’을 손봐야 한다. 5%룰은 상장기업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투자자가 지분 1% 이상을 사고팔 때 5영업일 이내에 공시하도록 한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5%룰을 완화해 공적 연기금은 주식 보유 목적과 관계없이 약식 보고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10%룰 완화에 대해선 신중한 반응이다. 지분 10% 이상을 가진 투자자가 투자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전환한 뒤 6개월 이내에 생긴 해당 기업의 주식 매매 차익을 반환해야 한다는 규정인데, 이를 국민연금에 한해서만 완화하는 것은 일반 투자자와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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