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23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공정경제 추진 전략회의에서 대기업을 향해 고강도 메시지를 내놨다. 연초부터 경제 활력 살리기를 내걸고 적극적인 기업 소통을 강조해왔던 문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들의 탈법 행위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밝힌 것. 특히 문 대통령은 대기업 지분 10%가량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공정경제를 위한 칼로 적극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재계는 청와대가 국민연금을 통해 대기업을 압박하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공정은 이 시대 최고의 가치”라며 “공정경제를 위해선 대기업의 책임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앞으로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선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일부 대기업 총수들의 갑질과 횡령 등이 사회적 논란으로 불거진 가운데, 국민연금이 가진 주주권을 적극 행사해 대기업 총수 일가의 일탈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한 중소기업 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질 때 우리는 대기업에 기술을 빼앗긴 중소기업의 사례를 계속해서 들어야만 했다”며 “공정은 혁신의 기반이며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라고 했다. 이어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우리 사회의 갑과 을이라는 말이 아예 사라지도록 더욱 노력해 달라”고 지시했다.
연초부터 기업 기(氣) 살리기에 주력했던 문 대통령이 대기업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11월에 이어 두 달 만에 공정경제 전략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경제개혁이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핵심 지지층의 우려를 불식하려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당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공정경제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는, 정체된 느낌이 든다”며 “부처 장관들이 공직사회를 어떻게 독려해나갈 것인가 고민하고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재계는 문 대통령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 발언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국내 기업은 299곳. 기업들은 한진그룹을 시작으로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가 확대되면 대기업 지배구조에 정부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장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고 있는 데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더불어민주당 의원 출신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는 실질적으로 기업을 옥죄겠다는 법안”이라며 “먼저 국민연금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키워야지 연금사회주의로 가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재계에선 15일 대기업 총수를 청와대로 초청한 간담회에서 민간 투자와 일자리 창출 확대를 내걸고 규제혁신을 강조했던 문 대통령이 대기업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을 두고 혼란스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22일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해 “한진그룹 문제가 시발이 돼 다른 기업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스튜어드십 코드의 적극적인 행사가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이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해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경영을 통제, 관리할 수 없다고 규정한 헌법의 가치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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