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서 총수 퇴진운동해도 제재못하는 ‘수탁자위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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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커지는 공정성-투명성 논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반대로 대기업 총수 중 처음으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등기이사직이 박탈된 가운데, 이를 결정한 수탁자위 소속 일부 위원의 자격 시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위원은 대한항공 주식을 보유하거나 위임받아 의결권을 행사했고, 장외에서 조 회장의 퇴진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전력도 있다. 국민연금의 목소리는 커졌지만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갖춰야 할 독립성과 전문성은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7일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장에 수탁자위 위원인 김경율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과 이상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김 위원이 소속된 참여연대와 이 위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이 위임받은 의결권은 51만5907주로 지분 0.54%에 달했다.

이들은 주총에서 소액주주를 대신해 주주권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전날 열린 수탁자위에서도 목소리를 냈다. 이 위원은 대한항공 주식을 1주 보유하고 있어 논쟁 끝에 수탁자위 최종 회의에서 제외됐지만, 김 위원은 직접 주식을 보유하지 않아 이해관계가 없다며 끝까지 회의에 남아 발언권을 행사했다. 회의 결과 4 대 4로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긴급하게 책임분과위원회 소속 위원들까지 소집한 결과 ‘연임 반대’로 결정이 났다.


국민연금은 기금의 장기적인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의 기금 운용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대한항공 조 회장의 연임 안건을 다룬 수탁자위에서는 어떻게 하면 주주 이익을 최대화해 연금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지보다는 일부 위원의 자격 및 회의 방식에 대한 논란, 정치적인 논쟁이 이어졌다.

수탁자위 구성을 보면 수탁자위가 연금 수탁자로서의 책임보다는 이념적인 측면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현재 수탁자위 내 주주권 행사 분과위원회는 정부 추천 2명, 연구기관 추천 1명, 참여연대 등 지역가입자 대표 추천 2명, 근로자 대표 추천 2명, 사용자 대표 추천 2명 등 9명으로 구성돼 있다. 기금 운용이나 경제·금융시장 전문가보다는 이념적 성향이 분명하게 나뉘는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수탁자위 한 위원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합리적 근거보다는 자신을 추천한 기관의 입장이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표결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도 이런 논란을 의식하고 수탁자위 위원들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책임 강화 방안을 내놨지만 실효성에 의문이 남는다. 주식을 직접 보유하는 등 특정 기업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에는 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김 위원처럼 주식을 위임받은 경우에는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또 장외에서 해당 기업이나 총수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한 전력이 있더라도 위원직 수행에는 아무런 제재 근거가 없다. 다만 주식 보유 사실을 미리 신고하지 않았을 경우 위원직이 박탈되고 민형사상 책임도 질 수 있다.

궁극적으로 국민연금이 민간에 의결권을 맡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말 기준 151조 엔(약 1555조 원)을 운용하는 세계 최대 연기금인 일본 GPIF는 모든 주식 운용과 의결권을 민간에 위탁하고 있다. 신탁형 투자를 통해 의결권 직접 행사에 따른 정치적 논란과 오해를 피하고 전문가들로 하여금 수익률 제고에 가장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올해 2월 금융위원회가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해 국민연금도 자산운용사들에 의결권을 위임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 이와 관련한 기준과 절차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은 “신탁형 투자는 연금사회주의 논란을 없애면서 국민연금과 운용사의 책임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라며 “일임투자 때 의결권까지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국민연금#수탁자위원회#주주권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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