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흘러가서는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사법행정 농단 사건 이야기다. 법원행정처가 정치권 로비를 위해 일선 법원의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진 것은 올해 1월이다. 계절이 3번이나 바뀌었지만 책임자 처벌은 물론 의혹이 사실인지 확정조차 안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법원 책임이다. 1세대 인권변호사이며 법조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인 한승헌 변호사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법원이) ‘이 바람만 잠잠해지면 괜찮지 않나’ 생각하는 거 같다. 압수수색도 기각, 기각, 기각. 이렇게 하는 것은 도저히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법부라고 볼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한 변호사는 또 “치유하지 않으면 병균이 어디엔가 남아 있다가 또 머리를 들고 나올 것”이라며 법원의 앞날을 걱정했다.
한 변호사의 비판은 정확하다. 사법행정 농단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지 3개월째지만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람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며 수집한 재판 관련 자료를 유출했다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파기한 유해용 변호사 한 사람뿐이다. 유 변호사가 10만 건가량으로 추정되는 재판 자료를 유출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큰 죄다. 하지만 재판거래 의혹 전체 그림에서 유 변호사는 ‘몸통’과는 거리가 먼 주변 인물에 불과하다.
형사재판의 한 당사자인 검찰이 법원 결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옳지 않다. 하지만 법원이 사법농단 사건 압수수색 영장을 90% 가까이 기각한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 힘들다. 법원 관계자가 검찰 조사에서 ‘어디에 가면 이런 자료가 있다’고 협조적인 진술을 해도 법원은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한다고 한다. 그렇게 압수수색 영장이 줄줄이 기각되는 바람에 검찰은 주요 피의자 소환 일정도 못 잡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검찰은 부족한 증거와 진술만으로 관련자들을 기소해야 한다. 특검이 수사를 하더라도 법원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 결과 재판거래 의혹의 당사자들이 무죄를 받는다면 법원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재판거래 의혹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수도권 법원의 한 형사재판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사건 당사자들이 내 재판도 의심할까 겁이 난다”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 있고 그 과정에 거래가 개입할 수 있다는 불신이 퍼지는 건 위험한 일이다. 불신이 상식이 되면 재판 불복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법원을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하루빨리 결론이 나야 한다.
법원이 스스로의 잘못을 고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국회가 나서야 한다. 국회는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권한을 갖고 있다. 문제가 된 법관들을 불러 헌법과 법률을 어긴 일이 있는지 따져 묻는 것은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처럼 국회 국정조사와 검찰 수사의 ‘투 트랙’을 가동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이번 사건 관련자들은 최고 수준의 법률가들이다. 국정조사가 열려도 방어권을 행사한다며 증언을 거부하거나 불출석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국정조사가 열리면 국민은 그들의 증언 또는 침묵의 행간에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또 ‘재판거래’ 의혹에 이름이 오른 이들 가운데 억울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명예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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